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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809
한자 金若礪
영어음역 Kim Yakryeo
이칭/별칭 용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성별
본관 경주
대표관직 진사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여(用汝).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김약려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따라서 사촌 동생 김용려(金用礪)와 함께 행동하지 못하였다.

김약려는 눈물을 흘리며 “은(殷)이 망하니 백이(伯夷)는 수양산에 숨었으며, 진시황 때의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에 숨었다. 남아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바치지 못한다면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라고 하며 노래를 지었다. 초야에 묻혀 살면서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등과 교유하였다.

[상훈과 추모]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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