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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룡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727
한자 海龍倉
영어음역 Haeryongchang
영어의미역 Sea Dragon Warehouse
이칭/별칭 사비포,조양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992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992년
폐지연도/일시 고려 말기
시행처 순천도호부

[정의]

고려시대 남원 지역에서 거둔 조세미(租稅米)를 보관하던 창고.

[개설]

해룡창은 사비포(沙飛浦) 또는 조양포(潮陽浦)로 불렸다. 조창(漕倉)이 설치되기 전부터 세곡(稅穀)을 수납하던 지역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순천도호부 남쪽 10리 지점 해룡산 부근으로 나와 있다. 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로 추정된다.

[제정경위 및 목적]

우리나라에 조창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 992년(성종 11)경이라고 이해되었으나, 근래에는 정종 때 지방제도를 확립하면서 창설되었다고 알려졌다. 주로 바닷가나 강변에 설치되어 선박을 이용해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중앙으로 옮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해룡창은 남원 지역을 포함한 전라도 남동 지방의 세곡을 수납하여,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옮기기 위해 설치한 곳이다. 수로를 이용하여 세곡을 운송하였는데,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을 두었다.

[관련기록]

조세미의 해상(海上) 수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海運倉)·해창(海倉)이라 하고, 강상(江上) 수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水運倉)·수참(水站)이라 했다. 조창의 분포를 보면, 고려 초기에 세곡(稅穀) 운송을 맡은 포(浦)를 모체로 하여, 개경 이남에 덕흥창(德興倉)[충주 여수포] 등의 12창을, 개경 이북에 안란창(安瀾倉)[장연 해위포]을 두었다고 한다.

[내용]

해룡창은 고려 때의 조창 가운데 하나로, 조운시까지 세곡을 수집·보관하던 하부 행정구획이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되는 판관이 독자적으로 업무를 관장하였다.

조창의 기능은 수집·보관과 아울러 운송에 있었다. 따라서 운송매체로서 각 조창은 세미(稅米)를 원활하게 운반하기 위해 소정의 조선(漕船)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종 때는 12창에 조선의 수를 정했다. 석두창(石頭倉) 등 10곳에는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을 각기 6척씩, 덕흥창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 흥원창(興元倉)에는 21척씩을 배치했다. 그리하여 각 조창에서는 매년 2월부터 조운(漕運)을 시작해 가까운 곳은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 운송을 마치도록 하였다.

또한,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에서 횡령과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각 조창에 창감리(倉監理)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조운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육로로 운송하게 됨으로써 조창은 유명무실해졌다.

[변천]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조창제도는 다시 정비되어 초기에는 수로 연변에 5곳, 해안 각지에 4곳의 조창을 설치해 전국의 세곡을 수납, 조운하게 했다. 그러나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조창을 거치지 않고 직접 경창으로 수송했다.

평안도·함경도·제주도는 세곡을 조운하지 않고 그 지방의 경비에 충당하게 했다. 조창은 창고라고 하지만 16세기경이 되어서야 창고 시설을 갖추었다.

충주의 가흥창(可興倉)과 아산의 공진창(貢津倉)이 창고 설비를 갖춘 것은 중종 때였다. 창고 설비가 미비했기 때문에 감독과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연해안에는 해운판관, 한강 연안에는 수참판관을 두어 각 조창의 세곡 수납과 반출을 감독하게 했다. 또한, 실제 세곡을 수납할 때는 판관을 수행하여 서기(書記) 1인, 사령(使令) 2인, 흡창(吸唱) 1인, 주자(廚子) 1인, 통인(通人) 1인의 임시 요원이 배속되어 창고행정을 맡았다.

평시에는 고을 수령의 관리 하에 각 조창에 고직(庫直) 2인이 간수하였다. 또한 조창은 3년과 5년 혹은 10년마다 이것을 주관하는 해당지역의 감사·수령·판관 등 감독관이 반고(反庫)라 하여 현품과 장부를 대조하고, 재고품의 보존과 관리가 적합한지를 조사하였다.

조선 초기의 조창은 중기 이후 변동을 보여 1512년(중종 7)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나주의 영산창(榮山倉)을 폐쇄하고, 그 대신 옥구에 군산창(群山倉)을 설치해 전라도의 세곡을 운반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세곡의 임운(賃運)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조창의 기능은 위축되어 해운창인 성당창(聖堂倉)·군산창·법성창·공진창의 수세 구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수운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 등이 모두 폐쇄되었다.

그 뒤 영조가 조운 정책을 강화해 경상도 연해안에 마산창(馬山倉)[마산]·가산창(駕山倉)[사천]·삼랑창(三浪倉)[밀양]을 설치하여 진주 등 22읍의 세곡을 조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운업의 발달과 작전(作錢)·작포(作布)·작목(作木) 등의 보급으로 후기의 조창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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