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남원백과

미스터리[mystery] 파근사 옛길 / 이훈정
  • 작성자
    이**
  • 작성일
    2011-11-21
  • 구분
    기사투고

옛날 붓집을 메고 다니던 육모정에서 운봉 방향으로 넘어가는 내기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뒷산 고개가 풀밭에 누워있는 소(平原臥牛)의 형국이라 하는데, 한양 조씨가 정착했던 당시에는 마을의 이름을 쇠고개 또는 牛峙洞이라 불렀다. 그 후 마을 주변에 송림이 무성하고 평온하기 이를데 없으므로 소나무를 상징하여 솔 고개로 바꾸었는데 지명을 한자화 하면서 內松이라 하였고 지금은 내기리라 한다.

1390년경 한양 조씨(漢陽趙氏)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씨(慶州金氏), 서산 유씨(瑞山柳氏)들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였다.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운 곳이라 한다. 이 파근사지에서 직선거리로 북쪽으로 1.5㎞쯤 떨어져 있는 회덕마을 뒷산에는 조경남장군의 의병이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들어오는 왜군의 침입을 막고 알리기 위해 쌓았다는 봉화대와 성터가 있고 이 봉화대가 있는 곳에서 운봉쪽으로 능선을 따라 2㎞쯤 가면 노치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에서도 조경남장군의 의병들이 왜군과 싸움을 벌였던 곳이기도 한다.원래 조경남 장군은 1570년 남원부 下元川坊 지금의 주천면 은송리 내송에서 출생했는데, 무예와 학문을 닦아 훌륭한 장수로 성장하니 그 활쏘는 솜씨는 날아가는 새도 백발백중 떨어 트리는 명궁으로서 묘기를 지녔으며 조선조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널리 의병을 모으고 의병대장이 되어 첫 싸움을 운봉 八良峙에서 왜구와 접전하여 적은 군사로써 대승을 거두었던 곳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조장군의 군사는 서로 부자간의 군병 같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군은 군사를 조련할 때 매일 九龍峙의 소나무 밑에서 훈련을 하고 이 소나무에 활을 걸어두고 쉬었다하여 그 소나무를 “장군소나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노송은 지금의 주천면 호경리 石堂위에 고고히 서서 600여년전 풍운을 한결같이 이기고 서 있다. 남원에서는 黃進, 梁漢奎와 더불어 조경남 장군을 우리고장 三雄이라 일컫는다. 그가 남긴 亂中雜錄(지방유형문화재 107호)은 그가 13세부터 53년여를 써온 일기로 임진 정유난의 정황과 당시의 정세 및 국제정세 등이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난중잡록에 보면 불우치, 궁장동, 숙성치, 하동 등에서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친 기록이 남아 있다.  내기리마을에서 남서쪽 인적이 끊긴 산길 4km쯤 가면 파근사가 나온다. 파근사지는 스님들이 들어와 계속 유지되어오다가 정유재란 당시에 이르러 조경남장군 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관계로 왜군에 의해 완전폐허지로 되었다가 그 뒤 어느 때인가 몇몇 승려들에 의해 이곳에 작은 규모의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이 사찰로 유지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유물들로 미루어 이 파근사의 창건연대를 고려시대 중기로 보며 만복사와 같이 남원부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다고 짐작되기도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원시 주천면 내기리이며 지리산 국립공원내 구룡폭포 위 비폭계곡의 상류로 지리산 국립공원 북관리사무소에서 동방 약 8㎞ 지점에 있다. 이 절터로 확인되는 지역은 약 6만평에 달하는 평지로 천연적 요새지처럼 동서쪽이 비교적 터져 있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 쌓여져 있으며 절터로 올라가는 계곡과는 달리 산의 정상과 거리가 매우 가깝다. 이곳에서 10여분정도 남쪽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남서쪽은 영제봉 전남 구례와 화개장터가, 북동쪽은 남원시 운봉면 북쪽은 이백면 서쪽은 남원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주천면 파근사는 스님들이 들어와 계속 유지되어오다가 정유재란 당시에 이르러 조경남장군 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관계로 왜군에 의해 완전폐허지로 되었다가 그 뒤 어느 때인가 몇몇 승려들에 의해 이곳에 작은 규모의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이 사찰로 유지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길의 생명은 무엇일까? 사람이다. 소통이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따라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길로 생각하였으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우거진 숲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너무 예뻤다. 2부 능선에서부터 조금씩 단절된 윤곽이 3부 능선에서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너무 반가웠다. 파근사에 가까워지자 여기 저기 나뭇가지와 풀숲에서 기와 파편과 주춧돌들이 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거진 숲을 헤쳐 온 보람이 있었다. 피로가 순간 가셨다. 반가운 마음에 석등의 중대석으로 생각되는 석재 1기를 디카에 담고 만져보고 조상들의 숨결을 느껴 보았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잡목과 가시덩쿨을 제치고 당시 조상들이 사용했던 흔적들을 앵글속에 담았다.

파근사 옆에는 부흥사가 있었다는데 주춧돌로 보아 남향으로 되어 있었다. 주변의 허물어진 돌 이끼는 수 백년이 된것 같았다. 먼 아래쪽을 보니, 노란 산수유꽃이 바람에 휘날릴때 마치 ''바다속 용궁과 같다''하여 이름 지엇다는 용궁마을이 보였다. 능선아래 산죽군락지에 석등의 1기 중대석이 반쯤 묻혀 었었는데 이 석등의 중대석으로 보이는 옥개석 1기가 주천면 고기리 절간 집 정원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부흥사가 있던 곳에도 건물 터가 두 곳 있으며 주변에도 기와 조각등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는 도굴꾼들이 군데군데 도굴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부도가 있던 장소에 묘가 있는데 올해 3월경쯤 도굴한 흔적이 남아있다.옥개석은 석등에 이용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부도위에 이용되었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직경 90㎝, 높이 약40㎝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6각형의 지붕형태를 조각하고 밑에는 추녀의 형태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옥개석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확인되었다. 파근사는 5개의 말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는 수련암, 연계암, 대흥사, 비선암 탑두부, 석불좌상과 호령사 석비좌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터마다  보리나 콩을 갈아 먹는 절구통, 확독, 사찰에 있었던 석등의 중대석으로 생각되는 석재 1기와 기와파편, 석물들만 보였다.파근사 절터에서 해암이라고 쓰인 부도는 깨져 버려 땅에 묻혀있고 나뒹굴고 있었다, 패인 것으로 보아 오래 사용한 것 같으며 부도는 파손되고 부도좌대로 보이는 석물 하부를 깊이 도굴한 흔적이 보인다. 부도가 있던 장소에서 위로 6m쯤 묘가 있는데 묘를 도굴한 흔적이 있었다. 

옛날에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구름 때 같이 모여 들었으나 중둘이 술판을 벌리고 일은 하지안고 놀고먹는 중들이 생겨나고 이곳에 오신 신자들에계 밥을 해줄 것을 일을 시켜먹고 하니 신자들이 하나 둘씩 거리가 멀어지고 절은 쇠퇴하였다고 한다.이곳 파근사 재 지리산이라는 기록밖에는 없다. 그러나 산속까지 길이나 있어 전남 구례와 남원을 있는 길이며 현재에는 무너진 상태로 있으며 거대한 바위들이 산사태로 인하여 길목을 막고 있다.현재까지 이곳 지방민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계곡을 파근사 골짜기 파근원 이라 부르고 있고 용궁마을에는 부흥사가 있다. 파근사에 대한 자료는 산속에 산재되어 있으나 이에 관련된 문헌이나 기록들이 없어 매우 아쉽다. 이러한 원인으로 파근사가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전혀 시민의 관심밖에 있다 하겠다. 그러나 평지에는 머우라고 하는 나물들이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묻혀있는 연꽃무늬는 그 동안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상당부분이 마멸되어 있다. 그 외에 부흥사절터에도 멧돌, 절구통은 깊이 묻혀 있고 윗부분에는 건물이 2채와 아랫부분에도 건물이 3채 정도 있었으며 부도가 있던 터 에도 건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파근사 가는 길가에 야생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지리산의 산중턱에는 자연과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며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현재 석탑 좌대석은 사람이 가져가고 무거워 들지 못한 것은 그대로 방치 되어 있고 무당이 기거하며 불을 피워 산불나기 쉬운 곳이므로 하루빨리 남원시는 문화재관리가 이루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