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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476
한자 華城龍珠寺田畓量案二件
이칭/별칭 기미양안,별본양안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7-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3월 26일연표보기 -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69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소장처 용주사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7-2]지도보기
성격 고문서|양안
관련 인물 정조
용도 양안, 토지대장
수급자 용주사
문화재 지정 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용주사에 소장된 토지 관련 문서.

[제작 발급 경위]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은 1799년(정조 23)에 작성한 '가경사년칠월일용주사전답양안(嘉慶肆年七月日龍珠寺田畓量案)'과 1804년(순조 4)에 작성한 '가경구년양안(嘉慶玖年量案)' 등 총 2점으로 구성되었다. 가경구년양안(嘉慶玖年量案)은 작성 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별본양안(別本量案)' 등으로 불렸으나, 2016년 연구에서 '가경구년(嘉慶玖年)'이라는 글자가 확인되면서 1804년(순조 4)에 작성된 것이 밝혀졌다.

1799년 양안은 수원지역 위토(位土)와 용인 및 수원 외곽에 위치한 불량(佛糧) 전답에 대한 기록이고, 1804년 양안은 용주사정조 사후 그가 안장된 건릉(健陵)의 조포사(造泡寺)를 겸하게 되면서 받은 위토와 추가적으로 매득한 전답을 합한 기록이다.

[형태]

1799년 양안은 세로 49㎝, 가로 32㎝, 1804년 양안은 세로 51㎝, 가로 31㎝이다.

1799년 양안의 권수제(卷首題)는 가경사년칠월일용주사불량전답양안(嘉慶肆年七月日龍珠寺佛糧田畓量案)이지만, '불량전답양안(佛糧田畓量案)'은 훼손된 면 아래에 종이를 덧대어 새로 쓴 글씨이다. 1장의 공격지(空隔紙)를 두었고, 남아있는 본문은 총 39장으로 검정색 괘선을 7줄 7칸으로 긋고 필사하였다. 본문 5, 6, 7장과 뒷표지는 없어졌고, 근대까지 지명(地名)과 항목을 수정하여 관리한 흔적이 있다.

1804년 양안은 앞표지와 뒷표지, 본문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의 앞면이 없어져 본래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 없어진 첫 장을 제외한 본문은 99장 1면이며, 98, 99, 100장의 하단 부분이 훼손되었다. 본문은 검정색 괘선을 8줄 8칸으로 긋고 필사하였다. 주묵(朱墨)으로 전답의 변동 사항을 기록하고 부지(付紙)를 붙여 작인(作人)의 변동 사항 등을 기록하였다.

양안의 두드러진 특징은 장황(粧䌙)에서 볼 수 있다. 녹색 포(布)로 만든 표지에 무쇠로 만든 변철(邊鐵)을 대고 5개의 구멍을 뚫어 못을 박는 철장(鐵裝)을 했는데 이 같은 방식은 조선 후기 왕실 의궤에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다만 표지 재질은 분상용(分上用), 제본 양식은 어람용(御覽用)으로 엇갈린 것은 기본적으로 어람용 양식을 따르면서도 자료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장황하였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두 양안의 장황 양식은 정조가 직접 열람하는 자료로서의 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른 사찰의 양안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는 당시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내용]

1799년 양안은 ① 면단위 토지 소재지, ②토지의 자호(字號), ③지번(地番)과 양전방향, 전품(田品), 지형과 전답 구분, ④ 해당 토지의 구획수, ⑤ 토지의 가로 세로 길이, ⑥ 곡물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 면적, ⑦ 파종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 면적(섬지기, 마지기 등), ⑧ 사표(四標)로 해당 토지의 동서남북 경계, ⑨ 양안상에 등록된 명의자를 기재하였다. 본문 끝에 작성 책임자로 '겸총섭 석철학(兼總攝釋哲學)'의 서압을 기재하고, '용주사 총섭인(龍珠寺兼攝印)'의 관인(官印)을 찍었다. 기재된 전답은 수원부와 용인현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총 결수는 23결 40부 3속이다. 현륭원 위전이 40결 75부 4속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용주사는 그 절반에 가까운 전답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04년 양안은 기재 내용이 1799년 양안과 거의 동일하지만 ⑦에 마지기 수 외에 도조(賭租), 세조(稅租)도 기재하였고 ⑨에 시작(時作, 소작인)을 기재한 것이 다르다. 각 장의 앞 뒷면과 쪽수가 연달아 있는 부분에 관인을 찍는 일반적인 관안(官案) 양식으로, 작성 책임자의 인문(印文)은 '수원부유수인(水原府留守印)'이며 본문 끝에 서압을 기재하였다. 기재된 전답은 총 91결 94부 7속으로 수원부와 용인현 외에 진위, 양성현, 단양 지역이 추가되었다. 나라에서 획급받은 토지와 매득한 토지, 시주받은 토지로 나누어 기재하였고, 1799년 양안에 비해 4배 정도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 소유한 토지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과 토지 운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나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에 대한 비호가 정조 사후에도 그 아들인 순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2012년 3월 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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