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신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164
한자 家神信仰
영어공식명칭 Worship of Household God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한선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집안에 존재하는 신에게 가정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믿음과 행위.

[개설]

가신은 집안의 여러 장소에 있는 신들로 외부로부터의 위험에서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해주며, 풍년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집안에 존재하는 신은 성주, 조왕, 조상, 삼신, 측신, 터주, 집지쿰이[집지킴이] 등 다양하다. 이들에 대한 신앙과 처소, 형태 등은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주로 집안의 부인들이 모시고 때로는 가장이 모시기도 한다. 가을에 추수한 뒤 행하는 안택이나 동지, 백중 등과 같은 명절에 정기적으로 가신에게 고사를 지냈으며, 집안에 출산을 하거나 우환이 있는 등의 경우에는 비정기적으로 고사를 지냈다. 또한 매월 초하루나 보름 등 길일을 택하여 조상이나 삼신, 조왕, 성주를 비롯한 다양한 가신에게 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경산 지역의 가신신앙은 비교적 일찍 단절되었다. 이미 광복 이전부터 가신을 모시지 않거나 그나마 전승되어오던 가신신앙은 새마을사업 당시의 가옥 개량으로 대부분 중단되었다고 한다.

[경산 지역의 가신신앙]

경상북도 경산시 점촌동에서는 신곡천신의 의미가 있는 안택굿을 할 때 ‘집안’한다고 하며 떡을 해서 조왕, 시주, 성주 앞에 놓고 빌었다. 마당에서 시작하여 조왕, 시주, 성주 순으로 빌고 나면 다시 마당에서 ‘거리풀이’를 하였다. 주로 봉사를 데려와서 했으며, 봉사는 큰 북을 치면서 하였다. 한편 이곳 주민들이 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으면 가장 먼저 성주받기를 하였다. 점쟁이에게 좋은 날을 받고, 그날이 되면 집을 지을 터에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었다. 막대기에는 문종이를 묶어 명태를 거꾸로 매달고 성주를 받기 위해 절을 하였다. 점쟁이는 집주인이 될 사람을 가려주며, 만약 예정된 집주인이 성주 받을 운이 아니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의 한 주민은 시할머니를 조상신으로 모셨다. 신체는 고리 안에 옷감을 넣은 형태로 안방 옷장 위에 모시며 정성을 들였다. 삼신이나 마찬가지로 여겼으며 집안에 아이가 아프거나 가정에 우환이 생기려고 하면 시할머니로 여겨지는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곤 하였다. 이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지만 2년 간 모시자 계속 모시기를 꺼려하여 인근 무당을 찾아가 더이상 모시지 않고자 한다고 하였다. 무당은 시할머니의 영험함이 대단하기 때문에 모시는 것을 중단하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고 하였고, 점괘를 통해 좋은 날을 받았다. 30만원 어치의 제물을 장만하여 조상과 당시 모시지 않던 성주, 조왕에게 정성을 들이고 조상의 신체를 태워 시할머니를 떠나 보냈다. 그럼에도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손주들이 아프면 며느리에게 장을 보게 하여 조상을 모시던 자리에서 간단하게 차려 비손을 하였다.

한편 송백리에서는 부엌[정지]에 깃들어 살림과 자식을 불게 하고 재수를 불러주는 조왕에게 빌 때는 옹기나 나무로 만든 그릇에 물을 떠놓았다. 한 주민은 조왕을 ‘정지 조왕님’이라 부르며 바가지에 물을 떠서 부뚜막 위에 올려놓고 빌었다. 자녀들이 승진을 앞두고 있거나 손주들이 큰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면 특별히 며칠 전부터 부뚜막에 물을 올려놓고 비손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서는 아이의 건강과 수명을 관장하는 삼신을 모셨다. 한 주민은 출산 후 시댁에서 몸조리를 하였다. 출산 후 시어머니가 안방에 삼신상을 차리고 한칠일[7일] 동안 치성을 드렸으며, 삼신상에는 건미역 1오리, 쌀 1그릇, 물 1그릇을 올렸었다. 삼신상을 차린 뒤에 첫 밥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출산 후 처음 먹는 밥을 ‘첫국밥’이라 하며 밥과 미역국을 먹었다. 한칠일이 지나면 삼신상에 올렸던 건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여 밥상을 차려주었으며, 이는 삼칠일 동안 삼신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한사리의 한 주민의 집 뒤꼍에는 짚으로 만든 ‘터주가리’가 있었다고 하며, 짚주저리 안에 나락을 넣은 단지를 봉안한 형태였다고 한다. 어느 날 구렁이가 터주가리 안쪽에서 나와 마당을 거쳐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이후부터 집안 살림이 가난해졌고 그 뒤로 터주를 모시지 않았다고 한다. 터주는 집지쿰이와 마찬가지로 여겨지는데, 집지쿰이었던 구렁이가 터주가리에서 나와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집지쿰이가 집을 떠났기 때문으로 여겨 집안에서 나오는 구렁이나 뱀은 해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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