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00
한자 義兵運動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Movement
이칭/별칭 의병투쟁,의병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정의]

1894년에서 1910년 사이 경상북도 경산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무장 항일 투쟁.

[개설]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한말 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전후해서 일어난 전기의병[을미의병(乙未義兵)],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해서 재기한 중기의병[을사의병(乙巳義兵)],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한국군 강제 해산을 전후하여 일어난 후기의병[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구분되고 있다. 경상북도의 경우 전기의병은 안동부(安東府)를 중심으로 각지 유생들이 선도하였고, 중·후기의병은 신돌석(申乭石)의 영릉의진과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경산 지역에서는 의병 부대가 직접 일어나지 않았지만 권병호(權秉湖) 의병장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이끈 경우가 확인된다. 또한 산남의진의 지역 부대나 청도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경산 지역으로 들어와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기 의병]

전기의병 당시 경산(慶山) 지역에서 뚜렷한 의병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기의병과 중기의병 사이에 무장농민운동, 곧 화적들의 활동이 자인(慈仁)·하양(河陽) 등지에서 자주 발생하였다. 무장 농민들은 부호가를 약탈·방화하기도 했지만,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도를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에 따르면, 1904년 11월 경부선 철도 주변의 경산군 주민이 철도 궤도에 와석(瓦石)을 쌓아 열차 운행을 방해하였다고 한다. 또한 1904년 음력 4월 초2일에는 경상북도 하양군(河陽郡) 와촌(瓦村)에서 적당(賊黨) 50여 명이 총검을 소지한 채 민가 6호를 방화하고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자인(慈仁) 삼거리에서는 일본인 2명을 구타하고 물건을 탈취한 일이 있었다. 또 같은 해 음력 8월 초9일 밤에는 적당 수십 명이 자인군 동초면(東初面)에 들어가 민가 20호를 불태웠고, 8월 21일 밤에는 기곡동(基谷洞)에 들어가 총을 쏘며 민가 20여 호를 불태웠던 사건도 일어났다. 여기서 ‘적당(賊黨)’이란 곧 무장 농민들로서 중기의병으로 이어졌던 세력들이다.

[중·후기 의병]

1906년 3월 영천에서 창의한 산남의진은 각지에 지대(枝待)를 편성하고 활동하였는데, 경산 지역은 운문산(雲門山) 지대에 편성되었다. 청도·밀양·울주·경주·영천·경산은 운문산을 접경하고 있어, 운문산 일대의 산지(山地) 교통로를 이용한 의병활동에 유리하였다.

경산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조직된 의병 부대는 없었다. 다만 산남의진 의병들이 영천·청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경산 지역으로 들어와 활동하는 경우가 확인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1906년 4월 20일 밤 의병 50명이 경산역(慶山驛) 부근 사원(寺院)을 공격했을 때, 경산군아(慶山郡衙)에서 진압군 30명을 출동시키자 이를 전멸시켰다고 한다. 또 의병들이 재차 경산군아와 경산역을 공격하겠다고 밝히자, 의병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 이외 보병 약 1분대가 출동하기도 하였다. 또 경산군 적한(賊漢)[의병] 진영달(陳永達) 등 6~7명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였는데, 진압을 위해 경상감찰부까지 나섰지만 실패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처럼 의병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각 지역에서는 자위단을 조직해 대응하였다. 당시 경상북도 내에서 조직된 자위단 수는 1907년 2월까지 경산 5개, 영천 23개, 신녕 8개, 하양 7개, 의성 17개, 의흥 13개, 군위 8개, 비안 18개, 자인 9개 등으로 나타난다.

경산 출신 의병 중 주목되는 인물은 경산군 남면 신석동[지금의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출신 권병호이다. 권병호는 1908년 1월 전라남도 장성군 용강사(龍江寺)에서 창의하여 의병 80명을 이끌고 일본 순사 4명을 처단하였다. 그 후 일본군의 추격을 받자 청도 운문사에 잠복했다가, 1908년 4월 초 청도군 동이위면(東二位面)[현 운문면] 공암리(孔巖里)에서 격문을 내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경산 지역과 관련된 의병 부대로는 청도의 윤만파(尹萬波) 의진과 최한룡(崔翰龍) 의진이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이끌고 청도와 경산 일원을 왕래하며 활동하였다. 윤만파의 소모장 구성립(具成立)과 종사 유진삼(兪進三) 등은 의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청도와 경산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권병호 의병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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