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95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개항기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까지 경상도 소속의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은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경산군(慶山郡)·하양군(河陽郡)·자인군(慈仁郡)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23부제가 13도(道)로 재편되면서, 세 고을은 경상북도 소속이 되었다. 1914년 일제는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이 시행되면서,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을 통합하였다. 이때 영천군의 남성동, 신녕군의 박사동, 청도군의 석현동도 경산군에 편입되었다. 개편 이후 경산군의 하부 행정구역은 와촌면·하양면·진량면·자인면·용성면·남산면·압량면·경산면·남천면·고산면·안심면 등 11개면이었다.

[개항기]

개항 이후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고 외래 문물이 유입되자 경산 지역에서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전개되었다. 1880년 정부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바탕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자, 영남 유림들은 이를 배척하는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곧 조직적인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로 이어지는데, 당시 경산 지역에서는 하양현 상동(上洞) 출신의 허호(許浩)와 자인현 난곡(蘭谷) 출신의 최기홍(崔基洪)이 참여하였다.

개항기 열강의 침략과 봉건 정부의 문란 속에 새로운 사상 체계인 동학(東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급기야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농민군은 외세와 열강에 대항하였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전라도의 지원을 받은 농민군이 각 군현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때 하양현에서는 진사(進士) 황재찬(黃在瓚)이 대구 출신의 유생 채헌식(蔡憲植)과 함께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시행하며 동학농민군의 침범에 대비하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노골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전쟁(義兵戰爭)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과 같은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에서 의병 활동은 1904년부터 확인된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던 일제에 저항하여, 자인과 하양에서는 화적(火賊)들이 당시 한창 공사 중이던 경부선 철도와 초기 일본인 이주민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인근 영천군에서는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되었는데, 경산 지역도 그 활동 범위에 포함되었다. 또한 이 무렵 청도 운문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경산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에 1907년 11월 자인군에서는 김세순(金世淳)이 거느린 의병 150명이 일본군과 교전한 바 있다. 또한 1908년 2월에는 하양군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펼치던 이봉조(李鳳祚)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편, 경산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1907년 8월 강제 해산되자,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설립되었다. 그런 가운데 1908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 자인지회(慈仁支會)가 설립되어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외에도 경산 지역에서는 신교육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경산 지역에 큰 변화를 불러 온 것은 1905년 1월 1일의 경부선 철도 개통이다. 경산군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면서 일본인 농업 이민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경산군이 경상북도 굴지의 미곡생산지였고, 경상북도 남부 지역의 물산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주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흥업주식회사가 등이 경산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고 농업 경영을 시작하였다. 또한 경산역을 통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대규모 수출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1910년 일제에 합병되면서 경산 지역은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한 변동이 나타났다. 특히 경부선 철도 부설에 따른 경산역의 역할이 증대하면서 경산군은 1914년 3월 부군면 통폐합에 의해 자인군하양군을 통합하였고, 군청을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구가 설치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다. 개편 직전 자인군 인민대표 변상묵(邊尙默) 등은 “기차역정(汽車驛亭)이 있는 경산군으로 위치를 내정 한다”라는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의 통폐합 소문을 듣고, 경상북도지사에게 진정서(陳情書)를 올려 “경산·하양 2군이 자인에 합부해야 한다”라는 건의를 하였다. 그러면서 “철도역이 있는 장소로 군청 위치를 정하면 재직 관리의 편의는 있으나, 인민 편리와 지방 행정에는 이익이 없고 불편한 점이 많다”고 주장하였다.

강점 이후 경부선을 통한 일본인의 이주는 증가하였고, 일본인들에 의해 경산 지역의 모습이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산역을 통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의 대규모 수출이 이루어지면서, 경산군은 대구부의 배후 도시이자, 주변의 영천·청도 등지를 포괄하는 교역 거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이주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흥업주식회사가 금호강 일대의 비옥한 농토를 점거하여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였다. 이 때문에 경산 지역의 농민들은 이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일찍부터 수리관개시설이 발달하여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경산 지역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수탈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수탈이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다양한 민족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산에서는 허병률(許秉律)과 서성용(徐聖鎔)이 191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光復會)와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참여하였고 그 외에 진행된 독립운동은 거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경산에서는 만세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일제에 저지당하였다. 대신 경산 출신 인사가 대구·영해 등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경산 지역에서는 허병률·김성로(金聖魯)·서동일(徐東日) 등에 의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재만 독립운동 세력과 연결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독립군으로 편성할 청장년 모집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청년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신간회운동 등의 대중운동이 활발하였다. 1930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강행하였다. 경산 지역도 일제의 전쟁수행에 따른 인력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하에서 경산 지역에서는 군자금 모집이나 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파괴 및 지하거점의 확보를 목적으로 개별적인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제의 징용에 반대하여 1944년 7월에 일어난 대왕산(大旺山) 죽창의거(竹槍義擧)가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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