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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16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이칭/별칭 일제시대,왜정시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 강점기는 일반적으로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를 말한다. 물론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의 대한 제국에 대한 보호 통치도 사실상 식민 지배와 다름없다고 보고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 기간을 4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비록 보호국이라는 형태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는 국권을 강탈당하는 1910년 8월부터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되는 1945년 8월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동반한 식민지 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을 억압하였다. 이에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여러 독립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경산 지역에서도 일제의 억압적인 식민지 통치 속에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행정 구역의 변천]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 행정 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1913년 12월 29일 공포된 「도의 위치·관할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1914년 4월 1일부로 부·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이에 기존의 경산군·하양군·자인군경산군으로 통폐합 되었으며, 이웃한 신녕군의 일부 지역도 흡수되었다. 그 결과 경산군은 경산면·안심면·하양면·고산면·압량면·와촌면·남산면·남천면·용성면·자인면·진량면 등 11개면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재편성 되었고, 오늘날 경산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농업과 일본 이주민]

경산 지역은 금호강 유역의 비옥한 대구평야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더욱이 개항 이후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경산역이 생기면서 일본인들은 도로와 철도 교통이 편리하고 평야지대인 경산에 주목하였다. 경산의 이주 일본인들은 1906년 54명, 1907년 116명으로 증가하여, 1911년 경산·하양·자인 3개 군 500명, 1912년 663명, 그리고 1914년 1,044명으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1911년 조선인 인구 59,990명, 1912년 61,662명, 1914년 69,094명과 비교하여 1911년 1.1%, 1912년 1.1%, 1914년 1.5%에 지나지 않지만, 전국적인 이주 일본인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치였다.

이주 일본인은 대체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농업 이민과 자유 이민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곡물 거래를 위해 경산 지역에 정착하였다. 즉, 경산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모여 든 곡물을 경산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였던 것이다. 경산역을 통한 곡물 수출은 칠곡의 인동과 왜관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았다. 경산군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곡물 거래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다음, 농업 경영을 위해 금호강 일대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였다. 1911년 경산군에서 1만 원 이상 투자한 일본인이 많았고, 이들은 일반 농사와 과수 재배를 했다. 일제 강점기 경산 지역의 최대 지주는 조선흥업 경산농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일본인과 일본 농업 회사들은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여 농업 경영을 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 방식에 따라 1910년대 무단폭압정치, 1920년대 이른바 문화정치, 1930년 이후 1945년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정책을 수행하는 전시 체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경산 지역의 독립운동도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응하여 전개되었다.

1. 1910년대

1910년대 국내의 항일운동은 비밀결사 활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비밀결사는 경상도 지역에서 비교적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의병전쟁 계열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민단조합(民團組合)과 계몽운동계열의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등이 대표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경산 지역에서는 일우(一友) 허병률(許秉律)광복회(光復會)에, 서성용(徐聖鎔)이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산의 애국지사들은 지역 내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다른 지역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대구 계성학교 교감이었던 경산 용성 출신의 백남채(白南採)는 동생 백남규(白南圭)와 대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었고, 고산면 사월리의 교회 목사였던 김기원(金基源)은 경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외 경산 출신 김무생(金武生)최경학(崔敬學)은 대구에서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고, 김성욱(金聲旭)은 영해읍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2. 1920년대

1920년대 경산 지역은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독립군으로 편성할 청장년 모집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허병률(許秉律)·김성로(金聖魯)·서동일(徐東日) 등의 활동이다.

한편,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된 청년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신간회운동 등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청년운동의 경우 1920년 11월 16일 창립된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 1921년 창립된 자인청년구락부(慈仁靑年俱樂部), 1921년 10월 창립된 경산청년회(慶山靑年會), 1922년 창립된 자인청년회(慈仁靑年會), 1926년 창립된 안심청년회(安心靑年會), 1927년 창립된 하양청년회(河陽靑年會)와 여성청년단체인 하양여자친목회(河陽女子親睦會)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리고 1926년경부터는 경산청년회를 사회주의 청년 운동 단체로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7년 6월 이후에는 조선청년총동맹의 방향 전환에 발맞춰 경산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들도 단일 청년동맹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리하여 경산청년동맹(慶山靑年同盟)이 조직되면서 경산청년동맹 하양지부와 경산청년동맹 안심지부가 설치되기에 이른다.

3. 1930~1940년대

193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감행하였다. 경산 지역의 경우에도 각 면에서 징병을 하기 위한 검사를 실시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년훈련소(靑年訓鍊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특별청년연성소(特別靑年鍊成所)와 여자청년특별연성소(女子特別靑年鍊成所)를 설치하여 무학적령자와 무학 미혼여성에 대한 인력 수탈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전시체제 하에서 경산 지역에서는 주로 군자금 모집이나 군관 학교의 입교생 모집, 파괴 및 지하거점 확보를 목적으로 한 개별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12월 경산군 하양 출신인 현영만(玄泳晩)무우원사건, 1943년 3월 박만선(朴晩善)의 비밀결사사건, 1944년 경산 하양 출신 최인환(崔仁煥)의 항일투쟁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1944년 7월 징용에 반대한 경산 지역 청장년들의 소위 대왕산죽창의거(大旺山竹槍義擧)와 1944년 8월 대구 제24부대 학병탈출의거 등도 주목된다. 이러한 저항은 일제 감점기 말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투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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