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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59
한자 大邱- 映畫人, 韓國映畵-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인.

[개설]

대구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던 1930년대부터 활동하였던 감독 중에는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이들이 많다. 대구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는 민경식, 이규환, 조긍하, 봉준호, 배용균, 이창동 등이 있다.

[한국영화를 이끈 도시, 대구]

대구에 극장이 등장한 것은 1907년 3월이다. 개항 도시인 부산과 인천보다 조금 늦었으나, 주요 도시 중 매우 빠른 축에 속한다. 그 후 여러 극장이 속속 등장하여 대구 시민들과 호흡하며 지역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 대구는 한국영화의 중심지로 변모한다.

육군중앙극장은 전쟁통에서 영화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2군사령부 정훈부에서 대구공회당을 인수하여 영화관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의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다. 대구 시민들은 잠시나마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영화관으로 달려갔는데, 매일 저녁 7시 영화 상영을 원칙으로 하였다. 미군 부대에서 빌려온 16㎜ 외국 영화 필름으로 무성영화 해설자인 변사가 등장하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당시 대구에서 유명하였던 변사로는 박칠성, 김해수 등이 있었다.

1952년 민경식 감독이 피난 중 대구를 배경으로 민초의 삶을 그린 영화 「태양의 거리」를 만들어 흥행을 거두었다. 「태양의 거리」대구 자유극장이 제작한 작품으로, 자유극장에서 간판 그림을 그렸던 대구 토박이인 민경식 감독의 데뷔작이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을 수집하여 디지털 상영본을 제작하였으며, 현재 향촌문화관에서 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영화의 맛을 본 대구 시민들에게는 한동안 가설극장도 인기를 끌었다. 넓은 공터에 흰 포장을 치고 차린 가설극장은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청 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이나 남문시장의 공터 등에 세워졌다.

춘사 나운규가 주연배우로 나온 「임자 없는 나룻배」이규환 감독은 대구 계성학교를 나왔다. 일본에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이규환 감독은 1955년 대구 달성군 가창에 대형 촬영소를 세우고 「춘향전」을 제작하였다. 이 영화의 대흥행으로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으며 여주인공인 조미령은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1957년 대구에서 사진관 운영자들끼리 만든 영화도 있다. 대구 중구 대신동에서 조광사진관을 운영하던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이다. 경상감영공원 앞에서 경우사진관을 경영하던 박재학이 제작하면서,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 개교 기념 연극 「개골산」에 출연한 바 있는 도금봉을 스카우트하여 인기를 끌었다. 조긍하 감독은 뒷날 신영균 배우를 데뷔시킨 「과부」를 찍기도 하였다.

대구를 배경으로 하였던 가장 유명한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1965년 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다. 서울에서 2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대구 명덕초등학교 5학년 이윤복 학생의 일기가 담임교사에 의하여 책으로 발간되고 영화화되면서 신영균, 조미령, 황정순 등이 출연하였다.

[대구 출신의 영화감독들]

1. 박남옥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朴南玉)은 1955년 영화 「미망인」을 내놓으며 전쟁 미망인의 욕망과 갈등을 파격적으로 그려 내었다. 박남옥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영화를 만들었다며 여성 감독에 대한 편견과 맞선 열정을 보여 주었다.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출신인 1923년생 박남옥은 대구로 이사하여 학교를 다녔고, 영화배우 김신재의 열혈 팬이 되었다. 경북여자고등학교 재학 시 투포환 선수로 전국체전 3회 연속 한국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포목상을 하던 부모님의 반대로 운동선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결국 이화여전 가정과에 진학하였다. 기숙사에 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았는데, 특히 베를린올림픽을 기록한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다큐멘터리 「올림피아(Olympia)」를 보고 큰 충격과 감명을 받은 박남옥은 이화여전 중퇴 후 『대구매일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는 동안 주로 영화 관련 기사를 작성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다. 1946년 본격적인 영화 인생을 시작하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영화촬영소에서 일하면서 버려진 필름을 편집하여 남몰래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국방부 촬영대에 소속되어 종군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동료 극작가와 결혼하였다. 출산 사흘 후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쟁 후 속출하였던 젊은 과부들의 이야기를 나눈 후, 곧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 「미망인」의 제작에 착수하여 한국영화사 최초의 여성 감독이 되었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언니에게 제작비를 빌렸기 때문에 배급사 이름은 ‘자매영화사’가 되었다. 오랜 꿈을 실현한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박남옥은 제작비를 절약하고자 딸아이를 업은 채로 15명의 스태프가 먹을 밥을 직접 짓고, 조명기를 손에 들고 ‘레디 고’를 외쳐야 하였다.

영화 「미망인」은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지만 안타깝게도 4일 만에 막을 내렸다. 여자가 만든 영화라는 점과 영화의 내용이 파격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영화의 실패와 이혼으로 낙담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박남옥은 1959년 영화 잡지 『시네마팬』을 발간하는 등 영화계에서 떠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권유로 둘째 형부의 회사인 동아출판사에 입사하게 된다.

이름조차 잊혔던 박남옥은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네거티브 필름을 통하여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에 그 존재가 알려졌고, 개막 초청작으로 「미망인」이 상영되면서 시대를 앞선 여성영화의 사례로 주목 받게 되었다. 특히 노동을 통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현실의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린 여성영화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평가 받았다. 2008년 제1회 박남옥영화상이 제정되고 1회 수상자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감독이 선정되었다.

2. 봉준호

현재 미군 부대가 있는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에서 1969년 봉준호(奉俊昊) 감독이 태어났다. 봉준호는 봉덕동과 이웃한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남도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가족을 따라 서울로 전학을 갔다. 봉준호의 부친은 대구에서 대학교수였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라고 불리는 당시 효성여자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고 영남대학교에서도 미대 교수를 지냈다. 봉준호는 어릴 때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앞산에 올라가 놀았던 기억, 못 둑에서 썰매를 탔던 기억 등 대구의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2019]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물론 한국영화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봉준호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한 뒤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홍콩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과 뮌헨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배우 송강호와 처음 작업한 영화이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한국적인 블록버스터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괴물」[2006], 해외 유명 스타들이 출연하여 세계에서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 준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 등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하여 나갔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영화인은 물론 전 국민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기생충」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4관왕을 수상하자 대구광역시의 영화 열기는 한층 후끈 달아오르기도 하였다.

3. 배용균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난 배용균(裵鏞均) 감독도 대구 출신 감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대구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배용균은 파리7대학 대학원 조형예술학 박사까지 거친 뒤 1989년부터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인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서양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이때 배용균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국내외에서 화제에 오른다. 1989년 제42회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감독상, 촬영상, 청년비평가상 등을 수상한 것이다. 깊은 산중의 절에서 젊은 수도승과 노스님, 동자승이 속세의 번뇌와 오묘한 진리 속에서 벌이는 구도의 과정을 그린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1989년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 부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제작자인 배용균이 감독, 촬영, 조명, 편집 등 주요 과정을 혼자 처리하여 한국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배용균 감독은 1995년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을 연출하기도 하였으며 2000년부터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4. 이창동

2007년 「밀양」이란 영화로 배우 전도연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 줬던 이창동 감독도 대구가 고향이다. 문학적 영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이창동 감독은 한국영화를 해외에 널리 알린 대표적 감독이다. 1980년대에 소설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90년대에 충무로로 건너와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감독이 된 특이한 이력의 감독이다. 1997년 영화 「초록물고기」로 데뷔하였으나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고 2000년 「박하사탕」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었다.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특별감독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창동의 다섯 번째 영화 「시」[2010] 역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2010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으며, 2011년 프리부르국제영화제에서는 대상과 비평가상을 받았다. 2018년 개봉한 「버닝」은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여 기대를 모았으며,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과 벌칸상[신점희 미술감독]을 수상하였다.

[독립영화의 메카, 대구]

대구가 독립영화의 도시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독립영화는 영화 소비에 머물러 있던 대구의 한계에서 벗어나 지역의 젊은 영화인들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고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가장 적합하고 실현 가능한 제작 방식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독립영화에 대한 투자를 늘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 지역 영화인들의 목소리다.

2017년 기준으로 대구 출신 단편영화 감독의 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수성못」, 「혜영」 등 4개 작품이 진출하여 2개 작품이 감독상과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김현정 감독의 「나만 없는 집」은 제16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 제34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부산시네필 어워드를 받았다. 고현석 감독의 장편영화 「물 속에서 숨 쉬는 법」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 부문에 진출하였다. 장병기 감독의 「맥북이면 다 되지요」는 제1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국내 경쟁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대구의 축적된 독립영화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대구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좋은 영화를 선보여 주목받고 있는 독립영화 감독들은 여럿이다. 최창환 감독은 제34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작인 「호명인생」[2008]을 비롯하여 제17회 인디포럼 초청작인 「그림자도 없다」[2011], 「내가 사는 세상」[2018], 「파도를 걷는 소년」[2019] 등을 만들었다. 유지영 감독은 「고백」[2011]으로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감독상, 「어느날 갑자기」[2014]로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미쟝센상 등을 수상하였다. 유지영 감독의 대구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 「수성못」은 2018년 4월 개봉하였다. 고현석 감독도 수상 경력이 화려한 감독이다. 「봄, 봄」[2014]으로 제15회 대구단편영화제 경쟁작에 이름을 올려 애플시네마 우수상, 「물 속에서 숨 쉬는 법」[2017]으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를 수상하였다. 김은영 감독은 「소녀의 방」[2011], 「고추가 사라졌다」[2013]로 대구단편영화제 경쟁작에 선정되었으며 「중고, 폴」[2016]로 제17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나만 없는 집」[2017]으로 제16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은 김현정, 제18회 대구단편영화제 경쟁작으로 선정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2017]을 연출한 황영 감독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대구 지역의 단편영화의 높은 수준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역량 있는 감독들이 많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좋은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독립영화 수준과 독립영화 감독들의 에너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대구단편영화제이다. 대구단편영화제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2000년 3월 대구경북 지역 영화인들이 지역의 독립영화 발전을 목표로 결성한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는 영화제작, 유통 배급, 정책 연구, 영상 교육 등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알리기 위하여 대구에서 만들어진 독립영화 16편과 당시 25회를 맞은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수상작 9편을 초청하여 창립 영화제를 열었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는 2000년, 극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이 지역 영상 제작 활성화를 목표로 설립한 단체이다. 20년 가까이 지역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크고 작은 상영회 개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지역 영화 정책 연구 및 개발 등 지역 영화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오고 있다. 2000년 11월에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를 출범시켰다. 대구단편영화제 기간 동안 국내 경쟁작, 대구·경북 기반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애플시네마 경쟁 부문, 초청작을 상영한다.

대구단편영화제의 개최는 전국의 단편영화 중에서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영화를 선정, 소개하고 지역에서 제작된 단편영화를 알림으로써 전국적 교류를 꾀하고 한 단계 성숙된 지역의 영상문화를 이끌어 내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2000년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는 첫 행사임에도 국내 본선 경쟁 부문과 대구 지역 영상제작 활성화를 위하여 마련된 ‘애플시네마’ 부문에 180여 편이 출품되었다.

2019년 제20회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회 측은 “대구 지역 청년영화인들이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를 선택하고 장편이 아닌 단편을 선택한 것은 당시 주로 만들던 영화 길이와 지역의 제작 여건을 감안한 현실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매년 성장을 거듭하던 단편영화제는 11회 때부터는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였다. 애플시네마 부문 상금 확대, ‘지역 영화제로서의 대구단편영화제와 그 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한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하여 대구단편영화제가 대구의 대표적 문화예술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2010년 처음 개최되어 2019년 10회째인 대구사회복지영화제도 주목할 만하다. 대구사회복지영화제는 복지를 주제로 하는 전국 유일의 영화제다. 빈곤, 주거, 의료, 노동, 교육, 장애, 환경문제 등 다양한 복지 관련 이슈를 영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담아 내려는 노력으로 출발하였다. ‘복지’가 단지 불쌍한 이들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닌, 모든 시민의 정당하고 보편적인 권리임을 사회적으로 소통하고자 2010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정부나 기업의 후원 없이 대구 지역 38개 노동·시민 사회단체와 기관이 공동으로 재정을 분담한다.

[대구의 남다른 영화관, 오오극장]

대구광역시에는 상업영화가 주를 이루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외에 독립영화 전용관인 오오극장과 예술영화 전용관인 동성아트홀이 운영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최초의 독립영화 전용관 오오극장은 2015년 2월 11일 55석의 작은 상영관 단관으로 독립영화 전용관으로 문을 열었다. 오오극장은 민간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간의 영화 및 문화 관련 단체와 독립영화에 갈증을 느끼는 관객들의 모금을 통하여 설립되었다. 영리 추구보다는 영화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하여 나가는 데 목적이 있다. 배급사와 개봉관이 없어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를 살리고 영화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시민 200여 명이 후원금을 보태고 지역 3개 단체인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대구민예총, 미디어핀다가 주체가 되었다.

오오극장은 극장 상영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의 독립영화,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가장 먼저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지역 영화 중심의 영화관이다. 또 주목 받은 감독이나 배우들의 영화도 보여 주고 있다. 지역사회 단체들과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특별전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오렌지필름 기획전, 세월호참사 특별전 등을 진행하였다.

서울의 두 곳을 제외하면 독립영화전용관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 대구가 유일하다. ‘오오극장’의 이름은 오오극장의 좌석 수에서 비롯되었다. 55석의 안락한 좌석으로 이루어진 상영관이 오오극장을 이루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영화관으로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한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커뮤니티 카페, 매표, 갤러리 공간인 삼삼(33)다방과 ‘삼삼오오’라는 의미로 짝을 이루고 있다. 지역사회의 공동체 공간으로 탄생한 오오극장은 독립영화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획전으로 독립영화 마니아들을 생성하고 있다.

오오극장은 ‘커뮤니티 시네마’라는 기치 아래 관객들 그리고 다양한 공동체들과 함께 상영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는 영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는 영화를 매개로 다양한 공동체와 소통하고 관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것이다.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활동하는 공동체와 함께 상영회를 기획하고 진행함으로써 영화를 통하여 공동체가 해결하고자 하는 이슈가 지역사회에서 소통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대구단편영화제, 대구사회복지영화제, 대구퀴어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 대구청년영화제의 주 행사 장소이기도 하다.

오오극장의 대표 서성희는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이기도 하고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이면서 동시에 사회적협동조합 대구경북영화영상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영화사 직원으로 활동하다가 10여 년 전 대구로 내려온 서성희 대표는 대구 지역 영화인들과 힘을 합쳐 대구 영화의 저력을 다시 살려 내고자 하고 있다.

1961년 영화사 통폐합 조치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어진 지역 영상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대구 스스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력과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이 서성희 대표의 생각이다. 현재 대구에는 50여 명의 단편영화 감독들이 있는데 제작비가 부족하여 십시일반 제작비를 조달하고, 기자재가 없어 서울에서 대여하여 쓰는 실정이므로 영상 생태계가 살아 있는 도시 대구를 만드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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