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93
한자 梧川書院
이칭/별칭 무릉재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20[파동 4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 오천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4년 - 오천서원 훼철
개축|증축 시기/일시 1905년 - 오천서원 개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9년 - 오천서원 중수
현 소재지 오천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20[파동 433]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4칸[강당]|3칸[서재]
측면 칸수 2칸[강당]|2칸[서재]
관리자 중화양씨 대구 파동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개설]

오천서원(梧川書院)은 1744년(영조 20)에 양희지(楊凞止)[1439~1504]를 기리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이다.

오천서원에 배향된 양희지는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다. 연산군 즉위 후 직제학과 부승지를 거쳐 1500년에 부총관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1502년 동지중추부사(中樞府使)가 되고, 겸세자우부빈객, 동지성균사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대봉집』이 있다.

[위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달성군 가창면 경계 지점에 서당골 또는 무릉계곡이라 불리는 골짜기를 조금 들어가면 옥산전씨 문중의 재실인 무동재(武洞齋)가 있다. 무동재를 지나 골짜기 안으로 10여 분 더 들어가면 오천서원이 있다.

[변천]

최초 창건 당시 오천서원은 현재 위치에서 북쪽 2㎞ 지점인 파령골에 있었으나 1864년 서원 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5년 현재의 위치에 개축하면서 당호(堂號)를 ‘무릉재(武陵齋)’로 고쳐 사용하였다. 1971년 유림 총회의 결정으로 사당을 신축하고 당호를 ‘오천서원’으로 바꾸었다. 2009년에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형태]

오천서원파동 끝자락 골짜기 안 야산의 남쪽 사면에 좌묘우학(左廟右學)[사당이 동쪽 강당이 서쪽]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땅의 형편을 고려한 배치이다. 서원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좌측이 강당 영역이며 우측이 사당 영역이다. 강당과 사당은 각각 흙돌담으로 경계를 이루며 사당 영역이 강당 영역보다는 지대가 한 단 정도 더 높다. 출입문은 남쪽으로 각각 1개씩 있으며, 별도로 강당과 사당의 경계 담에 두 영역을 직접 잇는 작은 문을 두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4칸에 모두 문을 설치한 폐쇄형 강당이며, 앞쪽으로 좁은 툇간이 돌출되어 있다. 5개의 전면 원기둥에는 모두 주련이 걸려 있다.

오천서원은 동재는 없고 서재만 있다. ‘무릉재’와 ‘화수대(花樹臺)’ 현판이 있는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가운데 1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둔 중당 협실형 건물이다.

[현황]

오천서원은 근래에 중수하여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의의와 평가]

오천서원 강당에는 많은 기문과 시판이 걸려 있다. 이 가운데 ‘중종대왕사제문(中宗大王賜祭文)’은 양희지 사후 3년 뒤인 1507년(중종 2)에 중종이 내린 제문이며, 242자 안에 양희지의 삶이 잘 축약되어 있다.

오천서원의 사우 동편에는 모두 6기의 제단과 제단비가 설치되어 있다. 중화양씨 시조 이하 6선조의 제단이며, 상단의 제단비에 ‘정승당악군양포지단(政丞唐岳君楊浦之壇)’이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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