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37
한자 大邱 法伊山 烽燧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2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영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425년 이전 - 대구 법이산 봉수대 건립
훼손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대구 법이산 봉수대 훼손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년 10월 1일~12월 31일 - 대구 법이산 봉수대 대구광역시 수성문화원에서 학술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9년 7월 15일~7월 22일 - 대구 법이산 봉수대 가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9년 9월 17일~10월 24일 - 대구 법이산 봉수대 가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2020년 9월 10일연표보기 - 대구 법이산 봉수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
현 소재지 대구 법이산 봉수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26 지도보기
성격 봉수대
양식 내지봉수
크기(높이,길이,둘레) 106.5m[둘레]
면적 650㎡[추정치]
관리자 대구광역시 수성구청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법이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개설]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통신수단이었다. 흔히 봉수는 이리 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낭화(狼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불렀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권설봉수(權設烽燧) 등으로 나뉘며 각 봉수별로 축조 배경이 다른 만큼 구조 및 형태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구 법이산 봉수대(大邱法伊山烽燧臺)는 내지봉수에 해당하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병고조(兵考條)」에는 제2거 직봉[동래~한양 간]에 포함된 간봉[8]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2010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대구광역시 수성문화원에서 학술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온문화재연구원에서 2019년 7월 15일부터 7월 22일까지 정밀 시굴 조사를 실시하고, 2019년 9월 17일부터 10월 24일까지 정밀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를 통하여 봉수대의 배 모양 방호벽과 개구형(開口形)·계단형 출입시설 등은 확인하였으나 거화(炬火) 시의 중요한 시설인 연조(煙竈) 또는 연대(煙臺)는 이미 훼손되어 확인하지 못하였다.

[건립 경위]

대구 법이산 봉수대는 1425년 간행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동쪽으로는 청도 팔조령에 있는 북산 봉수(北山 烽燧)와 북동쪽으로는 대구 고산에 있는 성산 봉수(城山 烽燧)와 연락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왜구(倭寇)의 침입이 해안지대를 넘어 내륙까지 확산되는 상황이 초래되자 감시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고종실록(高宗實錄)』 권33 고종 32년(1895) 윤5월 9일 기유에 훼손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위치]

대구 법이산 봉수대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 26번지에 있는 법이산[334.9m] 정상부에 있다.

[형태]

대구 법이산 봉수대는 방호벽과 출입시설 등을 갖춘 초대형 내지봉수이다. 방호벽은 배 모양이며, 둘레 106.5m, 동서 길이 약 42m, 남북 길이 약 21.3m이다. 출입시설은 개구형 및 계단형 등인데, 개구형은 하부 폭 1.2m, 상부 폭 2.3m, 잔존 높이 1.0~2.0m이고, 계단형은 폭 2.1m, 길이 6.1m이다.

[현황]

대구 법이산 봉수대는 2019년 정밀 발굴 조사가 종료된 이후 일부 복토(覆土)가 이루어졌다. 배 모양의 방호벽과 개구형·계단형의 출입시설 등은 정밀 발굴 조사 당시 노출된 모습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20년 9월 1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 법이산 봉수대는 조선 초부터 존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봉수이다. 1760년경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봉수와 기우단이 있다[有烽燧及祈雨壇]”라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유적이 2019년 정밀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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