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14
한자 烽燧
영어공식명칭 Bonghwa|Beacon
이칭/별칭 봉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
집필자 이재두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전통 시대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烽燧) 또는 봉화(烽火)는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올려 변방 지역에서 발생한 적의 침입이나 난리를 중앙에 알리던 통신 제도이다. 원래 봉수라는 용어는 밤에 불로서 알리는 봉인 연봉(燃烽)[횃불]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번수(燔燧)[연기]를 합친 말이다. 봉수가 행하여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한 것은 고려 후기였다. 각 고을 수령은 봉화를 담당하던 봉수군(烽燧軍)의 근무 활동을 수시로 감독할 책임을 졌다. 각 고을 수령은 봉수군의 차출과 근무 상황은 물론이고 봉수대 시설의 이상 여부를 항상 살펴야 하였다. 원래 봉수 신호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시작하였든 대략 열두 시간이면 중앙에 전달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전달 시간이 너무 지연되거나, 아예 불통이 되면서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1597년(선조 30) 일본군이 다시 침입을 시도할 때 봉수제는 변방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로파발[한성~의주], 남로파발[한성~동래], 북로파발[한성~경원] 등 세 개의 파발을 전국적으로 개설하여 봉수를 완전히 혁파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에 다시 복원하여 파발과 함께 군사 통신 시설로 존속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폐지되었다.

전국 5로의 주요 선로[간선(幹線)]를 직봉(直烽)이라 불렀다. 다섯 개의 직봉 노선은 동북쪽 두만강 변의 우암(牛巖), 동남해변의 응봉(應峰), 서북쪽 압록강 변의 여둔대(餘屯臺)와 정주(靜州), 서남해변의 돌산포(突山浦)를 기점으로 모두 서울의 목멱산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직봉 이외에 간봉(間烽)이라는 보조 노선이 각 직봉 선상에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중에는 직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 방면의 전선 초소로부터 본진(本鎭)·본읍(本邑)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다.

[대구광역시의 봉수]

전국의 봉수대는 직봉, 간봉을 합하여 670여 곳이었다. 그 가운데 대구 지역은 동래에서 서울까지 전달하는 제이거(第二炬)의 간봉 6과 8에 해당하였다. 남쪽 웅천현 천성보(天城堡)로부터 여러 곳을 거쳐 창녕 봉산(烽山)[현재의 태백산]→현풍 소산(所山)[현재의 쌍산]→성주 임내(任內) 가리현 말응덕산(末應德山)[현재의 덕산]→화원 성산(城山)→하빈의 마천현(馬川峴)[현재의 마천산]→성주 각산에서 간봉 2로 이어지는 경로와 웅천현 천성보(天城堡)로부터 김해·밀양·청도를 거쳐 청도 북산(北山)[현재의 팔조령]→수성 법이산(法伊山)→경산 성산(城山)[현재의 수성구 성동]→하양 시산(匙山)→영천 성황당에서 직봉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있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26번지에 있는 대구 법이산 봉수대는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둘레 106.5m인 초대형 배 모양[주형(舟型)]의 방호벽으로 내외부 출입을 위한 출입 시설 두 곳이 확인되었다. 또한 기우단(祈雨壇) 관련 시설인 홑화살괄호[〉] 모양과 미음[ㅁ] 자 모양 두 곳도 조사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대구읍지(大丘邑誌)』 산천 항목을 보면, “조족산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법이산이라 하며, 봉수대와 기우단이 있다. 팔조령에서 뻗어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역사적 문헌 자료와 발굴 조사가 일치하여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1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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