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동 지신밟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033
한자 鳳山洞 地神-
영어공식명칭 Bongsan-dong Jisinbapgi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놀이 장소 봉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지도보기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정월 초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서 정월 초에 행하던 민속놀이.

[개설]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서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땅을 다스리는 신령인 지신을 달래면서 한 해 동안 집안이 무탈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하였다. 이를 봉산동 지신밟기라 일컫는다

[연원]

봉산동 지신밟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해방 직후에 농악계가 하였다. 봉산동의 농악계는 한창 때는 70여 명의 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때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농악 대회에도 풍물패를 구성하여 참가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년에 세 번, 즉 정월 스무날, 사월 스무날, 칠월 스무날을 택하여 지신밟기 등의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로는 농악계 구성원들이 바쁜 일상과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등을 이유로 하나둘 떠나고, 지신밟기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분위기 탓에 농악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당집과 당나무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봉산동 지신밟기의 구성원은 쇠 2명, 징 2명, 장구 2명, 북 3명, 소북 5명, 포수 1명, 양반 1명으로 편성된다. 봉산동 지신밟기 구성원들의 복색은 나일론으로 만든 흰 바지 저고리에 노랑, 빨강, 녹색으로 된 천을 두른다. 지신밟기는 농악계가 당집에 가서 고사를 지내고 대내림을 받은 다음에, 당고사 제물을 주관한 집으로 제일 먼저 가서 풍물을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으로 농악계가 동네의 집집을 방문하여 지신을 밟으면서 걸립을 하였다.

[놀이 방법]

봉산동 지신밟기는 정월 초사흗날부터 사흘 간 가가호호 방문하여 걸립을 하며 풍물을 치고 논다. 잡색 중 포수와 양반이 재담도 잘하고 잘 놀아야 걸립이 잘되었다. 전체 과정은 다른 동네와 비슷하다. 먼저 풍물패가 마을의 대문 앞에 당도하여, “주인 주인 문 여소. 나그네 손님 들어가요”라고 외친다. 주인이 나와서 맞이하여 마당에서 상을 차리고 절을 한다. 그다음은 일반적인 순서에 따라 성주풀이, 조왕풀이, 장독대풀이, 곳간풀이, 우물풀이, 우사풀이, 방앗간풀이, 변소풀이, 문간풀이 순으로 이어진다. 봉산동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중구의 삼덕1·2동이나 동인4동처럼 다른 마을 풍물패의 실력 좋은 상쇠를 초청하지는 않고, 자체 동민들로만 풍물패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판굿이나 길굿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지신밟기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행해진 집단적 민속놀이이다. 정초의 지신밟기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집 안의 액운을 물리치고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마을공동체의 번영과 협동을 다졌다.

[현황]

봉산동 지신밟기는 현재 전승되지 않고 있다. 지신밟기를 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행할 수 있는 풍물패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농악계가 걸립을 할 때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대문을 열어 반갑게 맞아 주고 밤이 늦도록 풍물을 칠 때도 있었으나, 마을이 점차 도시화되고 이주민이 많아지면서 마을의 공동체의식 또한 흐려졌다. 그리고 동신제나 지신밟기를 미신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점차 형성되어 농악계나 걸립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봉산동 지신밟기는 세시풍속으로서의 제의성은 물론이고 민속놀이로서의 의미도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봉산동 지신밟기봉산문화거리에서 각종 축제나 명절 때 다른 동 또는 다른 지역의 풍물패가 행사의 일환으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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