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992
한자 妓生組合
이칭/별칭 예기조합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9월 - 최초의 기생조합인 한성예기조합 설립

[정의]

1907년 관기 제도가 폐지된 후 대구의 기생들이 만든 조직.

[개설]

기생조합(妓生組合)은 기생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예를 학습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변천]

1909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관기 제도가 실질적으로 폐지되면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경기(京妓)는 물론 평양을 비롯한 지방의 향기(鄕妓)들도 서울에 정착하여 기업(妓業)을 이어 갔다. 서울에 기생 수가 증가하자 기생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예 학습도 할 수 있는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9월 설립된 한성예기조합으로 알려져 있는데, 1908년 「기생단속령」이 발포되는 것으로 보아 이보다 일찍 설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서울과 남도 출신 기생들이 광교기생조합을 조직하고, 평양 출신 기생을 중심으로 한 서도 출신 기생들이 다동기생조합을 조직하였다. 1914년 기생조합이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바뀌게 되면서 광교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기생조합은 대정권번으로 바뀌었다. 1918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기생들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설립되었고, 삼패 기생 중심으로 경화권번도 설립되었다. 그 후 서울에는 조선권번, 대동권번, 대항권번, 경성권번, 종로권번, 삼화권번 등이 부침하였다.

대구에서 관기가 실질적으로 없어진 것은 박중양이 대구군수로 부임한 1906년 7월이며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와 경상감영에 소속되어 있던 200명 전후의 서기, 하인, 관기를 모두 없앴다. 대구부의 기녀들이 1910년 5월 무렵 기생조합소를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대구의 기생조합대구예기조합, 대구기생조합 등 다양하게 불렸다.

[구성]

대구기생조합에는 1912년 2월 당시 130명의 기생이 소속되어 있었다. 1918년 조선연구회에서 발행한 『조선미인보감』에는 대구기생조합 소속 기생 32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상남수를 비롯하여 28명이 대구 출신이고, 송홍련과 안선옥은 부산 출신, 노소옥은 평양 출신, 조산월은 서울 출신이다.

연령별로 보면 28세 1명[상남수], 23세 1명[염옥련], 22세 1명[이옥화], 21세 3명[도난옥 등], 20세 2명[안사운 등], 19세 1명[강매월], 18세 4명[이점홍 등], 17세 2명[노소옥 등], 16세 4명[김산옥 등], 15세 3명[최경난 등], 14세 9명[백금옥 등], 13세 1명[최금란]이며 14세가 가장 많다.

1922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대구기생조합의 근하신년 광고에 의하면, 당시 취체(取締)는 염농산이고 부취체는 박우춘, 총무는 엄주상, 간사는 상설매와 김록주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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