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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리 107유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41
한자 竹谷里 百七遺蹟
영어공식명칭 The Ancient Site at Jukgok-ri, Dal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107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5월 7일~2009년 5월 29일 - 죽곡리 107유적 영남 문화재 연구원이 발굴 조사
현 소재지 죽곡리 107유적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107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영남 문화재 연구원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천평2길 43[천평리 221]
성격 유적
면적 24,711㎡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에 있던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죽곡리 107유적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의 죽곡 청아림 리슈빌 4단지 리슈빌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조사 지역은 경상북도 성주군 방향으로 이어지는 국도 30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지나가며, 북쪽에는 대구 지하철 2호선 대실역이 위치하고 있다. 최근까지 이곳은 대부분 경지 정리되어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일부는 임야 및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대구 달성 죽곡2 택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영남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2005년 8월 12일부터 그해 9월 25일까지 지표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 결과 지표에서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변에 죽곡리 고분군(竹谷里古墳群)죽곡리 9-2유적이 근접하여 있고, 금호강 변 서쪽에 위치해 배후 습지성 충적지를 이루고 있는 등 입지상 유적 분포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후 2007년 8월 17일부터 동년 12월 28일까지 시굴 조사[42만 5132㎡]가 실시되었고, 조사 결과 고려 시대의 경작 지구[Ⅰ구역]와 통일 신라 시대의 돌방무덤, 시대 미상의 움무덤[Ⅱ구역]이 확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5월 7일부터 2009년 5월 29일까지 발굴 조사[2만 4711㎡, Ⅰ구역 2만 3673㎡・Ⅱ구역 1,038㎡]가 실시되었으며, 조사 결과 통일 신라 시대의 돌방무덤 1기와 고려 시대의 밭 6기, 시대 미상의 움무덤 2기가 확인되었으며, 출토 유물은 토기·자기 등 총 8점이다.

밭이 위치하고 있는 Ⅰ구역은 서쪽 구릉의 말단부와 하천 주변에 형성된 배후 습지성 충적지에 해당한다. 지형은 구릉 말단부인 서쪽에서 중심부까지는 비교적 편평하게 이어지다가 금호강 변인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북쪽과 남서쪽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현지표[매립층 포함] 5~6m 아래에서 밭이 확인되고 있다. 1~5호는 고랑과 두둑이 모두 동서 방향으로 고랑 형태가 거의 직선으로 매끄럽게 뻗어 나가며, 고랑보다 두둑의 폭이 넓다. 6호는 고랑 없이 소혈군만이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1호·3호는 너비가 85m 내외로 비교적 규모가 크며, 유적의 북쪽에 동서로 위치한다. 규모가 작은 2호·4호는 너비가 37m 내외로 유적의 남쪽에 남북으로 나란히 위치하며, 경계구에 의해서 남북으로 구분된다.

유적에서 조사된 고려 시대의 밭과 대구 지역에서 조사된 밭의 경작 형태는 삼국 시대 이후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경상남도에서 조사된 밭의 고랑 형태가 유사한 점은 선사 시대부터 고려 시대 이후까지 밭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식물 규산체 및 식물 유체 분석을 통해 밭에서 재배되었던 작물은 벼와 보리류로 해석되었다. 유적 내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편으로 출토되었고, 수량 또한 적어 편년에 어려움이 있지만 밭고랑 내에서 출토된 토기편과 구지표에서 수습되는 청자편을 통해 경작 시기의 하한이 고려 시대임을 추정할 수 있다.

돌방무덤은 시상과 벽석 일부만이 잔존해 있으며 1호 움무덤과 서로 중복되어 조성되었다. 돌방무덤이 구릉 비탈에 먼저 축조되었으며, 이후 움무덤 조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된 것으로 파악된다. 돌방무덤 주변 교란 지역에서 돌방무덤의 것으로 보이는 인화문 굽다리 사발[대부완]과 뚜껑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시문된 연속 마제형문으로 보아 7세기 후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움무덤에서는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시대를 판단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죽곡리 107유적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분묘와 경작 유구가 함께 있어 고대부터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지역이 대규모 생활 터전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밭은 면적이 수천 ㎡에 달해 대구광역시 지역에서 조사된 밭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이는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일원에 살았던 고대인의 활발한 경제 활동을 유추하게 해 주며, 타 지역에서 조사된 동일 성격 유구와의 비교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식물 유체 및 규산체 분석 결과 벼와 보리가 주로 재배되었던 건답일 가능성이 제시되었으며, 경작이 이루어졌던 당시 유적의 원지형을 복원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시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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