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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리 유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32
한자 椧谷里 遺蹟
영어공식명칭 The Ancient Site at Myeonggok-ri, Dal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1길 26[명곡리 42]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3년 3월 25일~2013년 9월 23일 - 명곡리 유적 영남 문화재 연구원이 발굴 조사
현 소재지 명곡리 유적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1길 26[명곡리 42]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영남 문화재 연구원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천평2길 43[천평리 221]
성격 유적
면적 20,346㎡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 있던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생활 유적.

[개설]

명곡리 유적(椧谷里遺蹟)은 남북 방향의 나지막한 구릉과 곡부에 분포하고 있으며, 명곡 체육 공원[다목적 운동장] 조성을 위해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지역의 해발은 35~45m로 통일 신라 시대 건물 터 등의 유구는 경사가 거의 없는 비교적 아래쪽인 해발 38m 선상에, 조선 시대 건물 터와 집자리 등의 유구는 비교적 경사가 있는 구릉 비탈부에 위치하는 특징이 있다.

[위치 및 현황]

대구 시내에서 달성군 현풍읍으로 통하는 국도 5호선 좌측 편 천내천과 합류하는 구간으로 실개천을 따라 형성된 곡부에 해당한다. 조사 지역은 곡부 좌우 측면 구릉 비탈과 구릉 말단부의 평탄 지역으로 발굴 조사 전 경작지와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일부에서 양식장 관련 구조물이 상부에서 확인되었다. 곡부의 실개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까지 임야와 개간된 밭 등으로 일부 표토층을 훼손하는 정도의 지형 변화가 있었으며, 하부의 급격한 지형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16년 현재 발굴 지역은 조사 완료 후 명곡 체육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문화재청의 발굴 완료 조치에 따라 조선 시대 1호 기와 가마는 현지에 성토하여 보존 조치되었고, 유적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명곡 체육 공원 조성 부지는 2011년 4월 26일부터 그해 5월 13일까지 동양 문물 연구원에 의해 지표 조사[4만 283㎡]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북동쪽 구릉 비탈부에서 기와편을 포함한 석축렬이, 과수원과 경작지 일대에서는 회청색 경질 토기편과 기와편이 확인되어 삼국 시대 고분군과 고려 시대 분묘 및 생활 유적의 분포 가능성이 있어 표본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유적 분포 예상 지역[2만 8276㎡]에 대한 표본 조사는 동양 문물 연구원에 의해 2012년 10월 24일부터 같은 해 11월 1일까지 실시되었으며, 조사 결과 추정 집자리 4동과 수혈 26기·주혈 8기·구상 유구 6기·석렬 1기·구덩무덤[움무덤] 1기 등 다수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표본 조사에서 유구가 확인된 지역[2만 346㎡]은 영남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2013년 3월 25일부터 그해 9월 23일까지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건물 터 7동과 배수 시설 1기·석렬 2기·와적군 1기·우물 3기·기와 가마 1기·수혈 28기·구 4기·구상 유구 9기·주혈군 13개소가, 고려 시대의 것으로 토기 가마 1기·도로 1기가, 조선 시대의 것으로 건물 터 3동과 수혈 집자리 5동·우물 1기·기와 가마 1기·아궁이 시설 1기·삼가마 2기·수혈 11기·구 10기·구상 유구 3기·주혈군 3개소가, 그리고 시기 불명의 구덩무덤 9기와 부석 유구 1기·화덕 자리 3기·수혈 1기 등 총 125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50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터는 C구역 북편에 군집되어 있으며, 중심 건물로 추정되는 적심 건물군과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굴립주(掘立柱) 건물이 확인되었다. 건물 터는 건물군의 방향성이 일정하고 연계되는 점, 각각의 건물 하부 시설이 서로 중복되지 않는 점, 동일한 레벨 및 토층에서 동 시기의 찍은 무늬[인화문] 수막새와 평기와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거의 동 시기에 축조되고 사용된 서로 연계된 하나의 건물군으로 판단된다. 적심과 기와가 사용된 이 건물 터의 성격에 대해서 발굴 조사자는 첫째, 관청 및 사찰, 둘째, 지방 호족의 개인 주택, 셋째, 객원[여관] 시설물의 가능성을 제기하였으며, 이중 객원 시설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으나 건물 터 내부에서 취사를 위한 내부 시설물이 확인되지 않아 숙식 해결보다는 잠시 쉬어 가는 지점 혹은 물품 보관[창고]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C구역 건물 터 관련 유구의 조성 시기는 1호구에서 출토된 꽃무늬[화문], 점열문이 시문된 병과 C구역 건물 터에서 출토된 종장 연속 마제형문 및 원호문+수적형문 조합의 찍은 무늬 토기 편, 단판 선문계열의 평기와, 그리고 중판의 연화문 수막새, 귀면와의 형태 등을 볼 때 7~8세기 대로 추정된다. B구역의 생활 유적 조성 시기는 민무늬의 굽 달린 사발[대부완], 호상문+점열문이 시문된 병, 편병, 해무리굽 청자 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 후기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생활 유구는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중권문·포도문에서부터 집단 찍은 무늬, 귀얄문 등이 시문된 분청사기와 백자가 출토되어 건물 터 1호를 포함하여 조성 시기는 16~17세기 대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명곡리 유적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조성된 생활·생산 유적으로, 이 시기의 달성 지역 생활상과 기와 생산 체계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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