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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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義善 |
영어음역 | O Uiseon |
이칭/별칭 | 오희선(吳羲善),우단우(禹丹宇),기선(基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오의선은 1919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2·8독립선언이 있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이 되었으며,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 예산결산위원장 등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재정 문제의 타결을 위해 내외 공채(公債) 발부, 의연금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재원으로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7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1년 베이징[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김복(金復) 등이 독립자금 모금을 위하여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의 주식을 모집하도록 계획·관여하였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6·10만세운동 후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1926년 9월 3일 김철수 등과 회합하여 당 조직 문제를 협의한 후 9월 12일 책임비서 김철수, 조직부 오의선, 선전부 원우관으로 하는 임시 중앙간부를 조직하였다.
1926년 10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만주공산청년회그룹과 통일하여 조직을 개편한 뒤, 오의선을 제2대 책임비서에 선출하여 동만 지방을 중심으로 급격히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1931년 3월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