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강복선은 27세 때인 1908년 4월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2차 의병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다.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을 모집하고 교전 활동을 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곡부). 자는 희성(希聖)·응성(應聖), 호(號)는 휴암(休巖). 창원공씨의 시조인 공소(孔紹)의 5대손이자, 공숙(孔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공의달(孔義達)이다. 어머니는 죽산 박원인(朴元仁)의 딸이며, 처는 파평 윤영세(尹永世)의 딸이다. 공서린은 1507년(중종 2) 진사시를 거쳐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낭관과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주요 도로, 교통 수단 및 관련 시설. 용인시의 교통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철도와 자동차가 중심이었으나 현재는 자동차 교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주요 교통기관은 자가용과 버스이다. 버스는 공용버스·일반버스·직행버스·마을버스·시외버스 등이 있다. 버스 노선을 보면 2008년 11월 현재 국비공영버스가 3개노선,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죽능리와 백암면 용천리에 걸쳐 있는 산. 『택리지』에 ‘죽산 남쪽(북서쪽의 오기)에 구봉산이 있는데 봉우리가 빙 둘러 있어 산성을 만들 만하고 또 기호로 통하는 큰 길 복판을 차지한다(竹山南 有九峰山 山回環 可作山城 具據畿湖 孔道中央)’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지』죽산현편에는 ‘현 서북쪽 22리에 있는데 병풍을...
-
신라 하대의 지방세력가. 기훤(箕萱)은 신라 말기 안성·죽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지방 세력가로 가계나 출생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진성여왕 때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던 가운데 국내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국고가 비어 재정이 궁핍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이 공부(貢賦)를 독촉하자 889년(진성여왕 3) 전국에서 이에 저항하는 반...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명화는 용인군 모현면 부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사근은 농사를 짓다가 1907년 임오교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수백 명의 의병들과 함께 경기도 죽산·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용인·죽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가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는 반일 항전을 일으켰을 때 여본구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장옥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항일 유격...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재천은 26세의 나이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제2차 용인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제2차 의병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으며,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 모집과 교전 활동을 벌이다...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서흥(瑞興). 자(字)는 여문(汝文), 호(號)는 창죽헌(倉竹軒)이다. 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다. 죽산부 양지현(陽智縣) 월노동(月老洞)[현재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서 태어났다. 1555년(명종 10) 6세 때 서당(書堂)에서 글을 깨우쳐 즉흥시를 지었으며,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그 슬픈...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서흥(瑞興). 할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고, 아버지는 김충수(金忠守)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 김충수가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하여 10월 말경에 죽산(竹山)의 청용산(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옥신리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倭將) 후쿠시마 마...
-
능원 일대에 세거하는 성씨로는 영일정씨(迎日鄭氏)와 연안이씨(延安李氏)를 들 수 있다. 영일정씨는 본래 연일정씨(延日鄭氏)라고 하는데 연일이 영일군에 포함된 면(面)이 되면서 영일로 관향(貫鄕)을 통일하게 되었다. 영일정씨가 능원 일대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안골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택(幽宅)이 자리 잡게 된 데서 연유한다. 포은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사람이나 차들이 다니는 비교적 큰 길. 경기도의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용인시는 북쪽에 성남시와 광주시, 동쪽에 이천시, 남쪽에 안성시와 평택시, 서쪽에 화성시, 수원시, 의왕시와 접해 있어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한 도로망을 가지고 있다. 용인시를 지나는 도로는 남북을 지나는 경부고속국도와 동서를 관통하는 영동고속국도, 남북을 지나...
-
오일장은 전국 각지에서 닷새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재래시장을 말한다. 용인 지역 역시 산업화로 인해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기 이전, 즉 전통적 농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1960년대 말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용인장(김량장)을 비롯하여 백암장, 원삼장, 송전장, 모현장 등은 용인 지역의 대표급 재래시장이었다. 2009년 말 현재...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용인의 독립운동가는 의병부대 및 항일 무장단체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 밖에도 언론·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피탈의 상황을 국내외에 알려 독립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우선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면, 용인 지역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약한 임옥여·정...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속하는 법정리. 미평리는 미륵뜰, 즉 ‘미륵이 있는 들판’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다. 마을 한가운데 석조불상[약사여래불]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를 미륵으로 부르고 한자로 옮겨 미평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미평리의 미륵(약사여래불)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때 절이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미 마을이 있었던...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회헌(晦軒). 고려에서 정승을 지낸 박전지(朴全之)의 고손이며, 할아버지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박문보(朴文珤)이며, 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박영충(朴永忠)이고, 부인은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한(李澣)의 딸이다. 아들은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이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속하는 법정리. 박곡리는 본래 양지군 박곡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박곡은 바깥쪽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보인다. 즉 본래는 밭골이나 밧골로 불리던 것이 박골로 변화되고 한자로 옮기면서 박곡(朴谷)으로 표기된 것이다. 박석리는 본래 죽주(竹州)에 속했던 지역으로 원래는 대곡부곡(大谷部曲)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측...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증조부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박문보(朴文珤)이고, 할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박영충(朴永忠)이며, 아버지는 병조참의를 지낸 연흥군(延興君) 박고(朴翶)이다.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한(李澣)의 따님이다. 아들은 찬성사(贊成事)...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박인영의 정려각. 박인영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여안(汝安)으로 박민흥(朴敏興)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 26)에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재덕을 겸비하여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효행은 근천지효(根天之孝), 격천지성(格天之誠)이라...
-
조선 전기 용인으로 유배된 무신. 본관은 죽산. 호는 호곡(壺谷). 조선 건국에 대장군으로서 공이 있어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고,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지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 자기는 논공(論功)에서 2등이 되고 이무(李茂)는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된 것을 비방하였다가 도리어 죽주(竹州)[현재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에...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에 있는 서낭당.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의 백봉리에는 백봉2리의 벌말(평촌)과 백동마을(잣나무골), 백봉6리의 사은마을(샛말), 백봉8리의 봉리마을 등에 서낭당이 있었다. 벌말의 서낭당은 광고개 서낭당으로 불리고, 백동마을의 서낭당은 훈고개(큰고개) 서낭당, 사은마을의 서낭당은 숯돌고개 서낭당이라고 불렀다. 이들 서낭당은 현재...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속하는 법정리. 백암의 본래 표기는 배관(排觀)이다. 1770년(영조 46)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배관장(排觀場)이란 명칭이 처음 보이고 이후 각종 『읍지』류에도 동일한 표기가 보인다. 이후 1827년(순조 27)의 『임원경제지』에는 배감(排甘)으로 나타난다. 백암(白岩)의 표기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보이는 표기이다. 이는...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암리에 있는 전통 재래 시장. 백암장은 조선시대에 죽산현에 속했던 장시로, 배관장(排觀場) 혹은 배감장(排甘場)으로 불리었다. 언제 설시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시적고(市糴考) 향시조(鄕市條)에 ‘배관장’이란 이름이 기록상 처음 등장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울과 수원·안성 등 경기 지역 상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과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에 걸쳐 있는 산. 옛날 각종 지지를 보면 보개산과 석성산을 같은 산으로 혼동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현 동쪽에 있는데 높고 험하며 둘레가 942보이다. 안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말라버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할미성이 있는 산을 지칭한 것이다. 『대동지지』에는 “보개산...
-
조선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의 관아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전국적으로 5개 망으로 구성되었던 봉수망 중에서 용인의 봉수는 경상도에서 출발하여 충청도를 거쳐 광주 천림산에 도달하는 제2봉에 속해 있었다. 유형에서는 서울의 경봉수와 해륙 변경의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인 내지봉수의 성격을 지녔다. 봉수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
-
고려 후기의 충신. 본관은 순창(淳昌). 호는 송헌(松軒). 보국판서(輔國判書) 설안통(薛安統)의 아들이고 중랑장을 지낸 암곡 설응(薛凝)의 아우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죽산(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으로 돌아가 자정(自靖) 하였다. 이후 태종이 두 번이나 병조참의를 제수하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
전통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된 방어 시설. 용인은 조선시대의 용인현을 계승한 지명으로 고려시대에는 용구현과 처인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용구현은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구성현 혹은 멸오(滅烏)라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 거서(巨黍)로 고쳐졌다가 고려 초에 용인으로 바뀌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구성현을 차지하...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송교원은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주원 의병부대는 임옥여 의병부대·이익삼 의병부대와 함께 2차 용인의병운동(1904~1909)을 이끈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죽산·양지 외에 수원·안성·당진·면천·풍도·서산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주원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일본군과의 교전을 통한 대일 항쟁과 이를 뒷받...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신순용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후 용인·광주·앙지·죽산·양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과 언남동으로 연결되는 고개. 죽산 자린고비가 된장을 발에 묻힌 채 달아나는 파리를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 파리가 여인네 엉덩이에 앉아 있는 것을 몰랐다. 파리를 잡기 위해 여인의 엉덩이를 치고 나서, 아차 실수했구나!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로 인해서 아차지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
-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와 백봉리에 있었던 반공 청년 단체. 국군의 후퇴 이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학생, 청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저항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저항 단체로는 경기도 고양 파주 지역의 태극단,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 지역의 반공투쟁 공작산악대, 강원도 춘성 북산면 수내리 지역의 반공결사대, 강원도 인제...
-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용인시의 역사. 용인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이래의 변화를 거쳐 1413년(태종 13)에 등장했다. 오늘날 용인시의 영역이 형성된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용인군과 양지군, 죽산군의 일부가 통합됨으로써 그 모태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지역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형성된...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 도사(都事) 조간(趙幹)의 딸이고, 아들은 오수채(吳遂采)이다. 오도일(吳道一)[1645~1703]은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성강(星江) 조견소(趙見素)에게 글을 배웠으며, 어...
-
경기도 용인시의 해주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오명항의 초상화와 양무공신 교서. ‘오명항영정병함부양무공신교서(吳命恒影幀幷函附揚武功臣敎書)’는 오명항 초상화 한 점과 일등공신으로 책록하는 교서 한 부 그리고 그것들을 담았던 나무로 만든 함 등 총 세 점의 유물을 말한다. 오명항 초상화는 1979년 9월에 해주오씨 문중에서 「오명항 양무공신...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경수(吳敬秀)이다. 오인수는 18세부터 포수들이 모여 솜씨를 자랑하는 화포계(火砲契)에 참여하여 늘 1등을 차지하는 등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安城)·죽산(竹山)·양지(陽智)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경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의병장 정철화(...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서 어정과 아차지내·메주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1985년에 출간한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채록 상황과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출간한 『용인군지』에는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과 조금 다른 이야기 두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1999년에 출간한 『용인 서부지역의 구비전승』에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두 편...
-
경기도 용인 지역에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성씨.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일종의 칭호로서, 아버지와 자식 간에 대대로 계승되며 절대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고려 중기부터라고 하는데, 시대에 따라 사라지거나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에는 본관(本貫)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관(...
-
오늘날 용인은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불린다.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전자와 전기, 자동차, 원자력 등등, 모든 분야의 첨단 산업 시설과 연구소, 연수원 등이 용인 지역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교통이 편리하고, 산업 시설과 연구단지가 서울을 비롯한 인근 시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입지에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대 이후 수지구와 기흥구를 중심으로 급속...
-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의병이란 나라 안에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의병들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는 전통 가옥. 이은수 가옥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위치하는데, 맹리는 옛 죽산 고을의 3대 길지 중의 한 곳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오래 된 주거지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주거지는 건지산(乾芝山)을 주산으로 삼고 수정산을 조산으로 삼았다. 지석묘에서 조금...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근거지로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부하 30~40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징치, 일본 경찰 습격, 빈민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일시적으로 관(官)에 자수하였으나, 다시 봉기하여 활약하다가 1909년 6월에 다시 붙잡...
-
조선 말기 경기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진.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에 있는 구한말 의병장 임경재를 기리는 동상. 농상공부 주서였던 임경재는 스러져가는 정국을 개탄하며 1907(순종 1) 7월에 이천군 신면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의병으로 나설 것을 결의하고 의병대를 편제하였다. 좌익장이 된 임경재는 용인, 이천, 광주,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
구한말 용인 지역의 항일의병장.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용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3대 독립운동가문을 배출 했을 만큼 용인 지역은 항일투쟁의 선봉에 있었는데, 옥여 임경재 의병장도 대표적인 한일의병의 선구자이다. 항일의병으로 양지군 주동면 평촌동[지금의 양지면 평창리]에 거주하였다. 본명은 경재(景宰), 대대로 무관장(武官將...
-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임진산성은 원래 임진산의 정상, 곧 수지구 풍덕천동 산 37번지와 기흥구 보정동 산 82-2번지 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산성지·풍덕천동성지·예진산성지 등으로도 불리는 임진산성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성이기도 한데...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대준은 경기도 용인군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정주원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정주원 부대에 속했던 죽산 출신 의병 신현구[1878~1909] 등과 함께 1909년 6월 3일에 경기도 죽산군 서삼면 시암장 내 여인숙 김운선 집에 들어가 일본인 중원방길(中...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
1896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내정간섭을 감행하는 양면 전략으로 한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즉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침략을 강화하자 극동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시켰으며, 5월 말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5년 들어 일본은 청과의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화시켜 11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
-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제촌부곡은 언제 설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려 이래 조선 초기까지 특수한 행정단위의 하나로 기능했다. 일반적으로 부곡은 군현으로 삼아 운영하기에는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양지현(陽智縣) 조에 “본래 수주(水州)에 속한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인데,...
-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의 역사. 1413년(태종 13)에 용구현과 처인현을 병합해 만들어진 용인현은 수원진영(水原鎭營)에 소속되었으며 남양부(南陽府)에서 관할하였다. 수원진에 부속된 시기에는 16개 면을 종5품의 현령이 다스렸으며, 훈도(訓導) 1명을 두었다. 1872년(고종 9)에 작성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걸로 보아 이와 같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속하는 법정리. 좌항리는 원삼면 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양지면과 맞닿아 있다. 좌항리는 황골[항곡]·좌찬[좌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좌찬의 ‘좌(佐)’자와 항곡리의 ‘항(恒)’자를 따서 좌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황골은 이곳 형상이 “마을을 품은 학 같다”고 해서 학곡(鶴谷)으로 불리다 황골이 됐다는 설이 있...
-
박기오를 시조로 하고 박원형을 조상으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에 세거 성씨. 죽산(竹山)은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와 안성시 일부가 속해 있던 지명이다. 죽산박씨(竹山朴氏)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경명왕의 넷째 왕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으로부터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에 의하면 박언립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왕건...
-
안영의(安令儀)와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죽산안씨는 구죽산과 신죽산 두 파가 있는데, 구죽산의 시조는 고려의 상서좌복야 안영의(安令儀)이고, 신죽산의 시조는 안향의 증손인 시중(侍中) 안원형(安元衡)이다. 구죽산에서는 고려시대에 공민왕의 국구로서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안극인(安克仁), 그의 아들로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낸 안숙...
-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 효자·효부 그리고 열부·열녀들. 충효열이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녀자가 지조를 지켜 남편을 따라 순절하는 행실을 통칭한 것으로 이를 삼강행실이라고 하였으며 유교 이념의 기본 덕목이다. 충(忠)은 삼강행실의 첫 번째 덕목이다. 용인의 대표적 인물은 포은 정몽주이다. 그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충의백(忠毅伯)으로서 사...
-
경기도 용인을 관적으로 하는 성씨. 우리나라 성씨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15세기에 존재한 전국의 성씨 종류와 본관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용구현 토성으로 진(秦)·이(李)·송(宋)·용(龍)·엄(嚴) 등 5개와 처인현 토성 이(李)·서(徐)·지(池)·섭(葉)·김(金)·강(康) 등 6개를 나열하고 있다. 또 양지...
-
백암면(白岩面)은 용인시 처인구에 속한 면으로, 용인시의 동남단에 위치한다. 동쪽은 이천시 모가면·일죽면, 서쪽은 용인시 원삼면, 남쪽은 안성시 삼죽면, 북쪽은 이천시 마장면·호법면과 접한다. 본래 죽산군 근삼면에 속했던 지역이었으며, 1914년 4월 1일 전국행정구역 개편 당시 외곽에 있는 4개 면을 합쳤다고 하여 이름을 외사면(外四面)이라 하였다. 1995년 광복 5...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동과 이동읍 천리에 걸쳐 있는 산. 『택리지』에 ‘죽산의 칠장산(七長山)이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 부아산(負兒山)을 일으킨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너미고개[水踰峴]에서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함박산과 하고개를 거쳐 부아산에서 높이 솟았다는 의미이다. 옛 문헌에는 함복산(含福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2001년에...
-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존재한 지방 세력. 신라 하대에 진골 귀족 내부의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호족이라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독자적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호족은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으로 자칭하면서 지방 사회를 통치하였으며, 중앙의 정치 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 기구인 관반제(官班制)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황명운은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가 참가한 정주원 의병부대는 1907년 8월에 거의하여 용인·죽산·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에까지 진출하면서 대일 항전을 하였다.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