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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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山海祠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이해준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20년대 - 이산해 사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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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1년 - 이산해 사당 이전 |
현 소재지 | 예산 이산해 사당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 |
원소재지 | 예산 이산해 사당 - 충청남도 예산군 |
성격 | 사당 |
양식 | 익공양식|맞배지붕 |
관련 인물 | 이산해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신 이산해의 사당.
[개설]
예산 이산해 사당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920년대 세웠던 것을, 1981년 인근 방산저수지 공사로 인한 수몰 위험으로 현재 위치로 옮겨 지은 건물이다.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이며, 할아버지는 판관 이치(李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다. 작은아버지가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李之菡)이다. 이산해는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거치며 1600년(선조 33)에는 영의정을 지냈다. 북인의 영수였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서화에 능하여 문장팔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건립 경위]
이산해 사당은 1920년대 당시 보령군에 살던 후손이 예산군으로 이주하면서 건립되었다. 이산해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184호] 아래에 사당을 짓고 그때까지 보존되던 이산해 영정도 함께 봉안하였다. 1981년 인근에 방산저수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재실과 사당 구역 전체가 수몰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아계파 종회에서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로 사당을 옮겨 다시 세웠다.
[위치]
대술면 소재지 북동 방면으로 제방을 따라 약 3.5㎞ 이동하면 오른쪽으로 방산저수지 방향으로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약 3㎞ 더 가면 방산저수지 북쪽에 위치한 음지말에 이른다. 이산해 사당은 음지말 서쪽 구릉 하단에 있다.
[현황]
사당은 이산해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정·측면 3칸 규모 건물이다. 시멘트와 화강석재로 기단을 높게 쌓은 후 원형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정남쪽을 향해 툇마루를 틔우고, 건물 각 칸마다 사분합문(四分閤門)[문짝이 넷으로 되어 열리고 닫히는 문]을 달았다. 익공 양식 공포(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를 쓰고 겹처마를 낸 맞배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올렸다. 사당 양 옆으로 방풍판을 두어 실내 가구를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