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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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誼-兄弟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용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20년(세종 2) - 의좋은 형제 우애 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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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97년(연산군 3) - 의좋은 형제 예산 이성만형제 효제비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의좋은 형제 예산 이성만형제 효제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 |
예산 이성만형제 효제비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 예산군 대흥 지역의 효자이자 우애가 좋았던 이성만, 이순 형제의 이야기.
[개설]
이성만(李成萬)·이순(李順) 형제는 고려 말 조선 초 예산 대흥의 유명한 효자이자 ‘의좋은 형제’로 알려져 있다. 동생의 이름은 한동안 ‘이순목(李順木)’, 이순(李淳) 등으로 적기도 하였지만, 동생 이름을 이순목으로 적었던 것은 자료를 잘못 읽은 탓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가족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고,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효를 대단히 강조하였다. 대흥의 의좋은 형제가 특별히 오늘 우리의 시대에 관심을 끄는 것은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만이 아니라 각별하였던 형제 우애의 사실이 기록과 구전의 형태로 오늘까지 전하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볏단을 서로 지고 옮기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바로 이 이성만 형제의 우애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남겨져 있다.
[초등 교과서의 형제 우애 이야기]
1964년 이후 ‘국민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성만 형제 이야기는 「의좋은 형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추수가 끝난 날 밤 동생은 생각했다. ‘형님은 식구도 많은데 식량이 더 필요할 거야. 보내드려도 받지 않을 테니 몰래 가져다 드려야지.’ 그런데 그날 밤 형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차렸으니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들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과 아우는 밤에 몰래 서로의 볏가리를 옮겨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벼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생각하며 다음날 밤 형과 아우는 다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였다. 이튿날 아침 다시 논에 나가 낟가리를 확인해 보니 변함이 없었다. 다시 밤이 되자 또 볏단을 나르는데, 구름 사이에서 달이 비춘다. 형과 아우가 서로 마주쳐 비로소 볏단이 왜 줄어들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이 초등 교과서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형님과 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몰랐습니다.
다시 밤이 되자, 형님과 동생은 몰래 논으로 가서, 벼를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저 쪽에서 누가 옵니다. 형님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때, 동생도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때이었습니다. 구름 사이에서 달님이 환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이구, 형님 아니십니까?”
“아, 너였구나!”
이제야 형제는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은 까닭을 알았습니다. 형제는 저도 모르게 볏단을 내던지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얼싸안았습니다.
하늘에서 달님이 웃으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형제 우애에 대한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에 바탕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우애의 현장은 예산의 대흥이었고, 형은 이성만, 동생은 이순이라는 이름의 실제 인물이었다. 문헌에는 이성만·이순 형제의 깊은 우애에 대하여, “매양 아침저녁에 형제가 서로 오고가고 하여 한 상에서 같이 먹고, 비록 음식 하나를 얻어도 반드시 함께 먹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1420년(세종 2) 정월 경신],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오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식사하였다. 맛있는 음식 하나를 얻어도 함께 모이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대흥 이성만 형제 우애비, 1497년(연산군 3)]라고 하였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우애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아침저녁으로 서로 간에 집을 찾았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를 바꾸어서 아침에는 동생이, 저녁에는 형이 간 것으로 반대로 되어 있는데, 아침저녁이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성만 형제 이야기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형제간의 우애와 애정의 한 전형인 것이다.
또 하나는 이들 형제가 음식을 항상 함께 나누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아침저녁 식사를 항상 함께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형제의 집이 서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식을 함께 나눔으로써 형제간의 정을 항상 확인하고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일체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음식 효자’ 이성만 형제]
이성만·이순 형제가 역사에 남게 된 것은 그들의 우애 때문이라기보다는 효행 때문이었다. 문헌의 기록에는 이성만 형제는 극진한 효행의 인물이었고, 그 내용이 두 가지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부모의 산소를 지키는 여묘(廬墓)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여묘는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일정기간[보통 3년의 상기(喪期)]을 슬퍼하며 지내는 것인데 그 기간 동안 사회생활을 중단하는 것이어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묘는 조선시대라면 ‘효자’의 필수과목이라 할 만큼 일반화된 행위이다. 이성만 형제가 모셨던 부모의 산소가 어디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대흥면에는 대야리에 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웃 광시면에는 마사리, 구례리, 은사리 등지에 고분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성만 형제의 극진한 효행 또 한 가지는 부모 살아 생전에 부모의 친지를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는 일종의 ‘음식 효도’이다. 부모 생전에 친지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잔치를 베풀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는 것이다. 효도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보통의 부모에 대한 음식 효도라면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성만 형제의 효도는 부모는 물론이고 종종 여러 친지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이었다. 잔치는 매년 봄가을로 베풀었다고 한다.
“대흥 호장 이성만은 그 아우 이순과 더불어 부모를 잘 섬겨 마음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매양 봄가을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부모의 아끼는 친구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어 그 마음을 기쁘시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켰다.”[『세종실록』 세종 2년 정월 경신].
“충청도 대흥 호장 이성만과 이순 등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가을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님이 아끼는 친척으로 함께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켰다.”[대흥 이성만 형제 우애비, 연산군 3년].
이성만 형제의 부모 친지에 대한 잔치는 ‘효행’의 사례로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이례적인 것이다. 고려 조선조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효행의 유형은 여묘 이외에 부모 간병(看病)이 있다. 간병의 방법으로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하거나, 손가락을 자르거나, 환자 상태의 진단을 위하여 대변의 맛을 보거나, 난치병을 기도로 치유하는 사례들이다. 간병 이외에는 전란 시에 부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례, 부모 원수에 대한 복수 등이 있다. 이러한 유형에 비추어 볼 때 대흥 이성만 형제의 효행은 고려 혹은 조선시대 다른 이의 효행 사례와는 그 유형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우선 주목하게 된다. 대흥호장 이성만 형제는 그 효행으로 인하여 세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게 된다.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케 하는 것이었다.
‘대흥호장’이라고 한다면, 당시 이성만 형제가 대흥현에서 비교적 유력한 지주층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호장은 고려 초기 호족에서부터 출발한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각 지방은 유력한 재지 세력이 등장하여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대흥의 경우 역시 백제 임존성의 전통을 이은 지역으로서, 또 고려 초의 통일전쟁에서 대규모의 전쟁이 야기된 지역이라는 점에서 대흥에 상당한 세력의 재지 호족세력이 존재하였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대흥현에는 토성(土姓)으로 이씨, 한씨, 백씨가 있다고 하여 조선 초까지 이씨는 대흥을 대표하는 토착 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의 이씨가 바로 이성만 형제의 집안인 것이다. 현재로서 이성만 형제의 본관이나 족보상의 계보 등은 확인되고 있지 않는데, 아마도 대흥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재지 호족은 고려의 통일과 중앙집권화 정책의 진전에 의하여 점차 중앙권력에 편입되고 유력한 이들은 중앙으로부터 향직을 제수받아 세습하게 된다. 그 향직 중 가장 높은 최고위직이 바로 ‘호장’이다. 따라서 이성만 형제가 대흥의 호장이었다는 사실은 그 선대가 대흥 지역의 유력 인물이었으며 고려조 대대로 대흥의 행정 등에 간여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집안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같은 배경에서 생각하면 이성만 형제는 토지와 노비와 어느 정도의 부를 갖춘, 지역에서는 다소 여유 있는 ‘유지’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성만의 효행과 관련하여 이성만 형제가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양 봄가을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부모의 사랑하는 친구를 맞아 잔치를 베풂으로써 그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라고 한다. 당시의 농촌 실정에서 봄가을로 부모의 친지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효성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경제적 여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효자’가 병든 부모를 정성으로 수발하는 사례, 혹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등의 사례인 데 비하여, 이성만 형제의 효행은 경제적인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인 것이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의 효행이었던 것이다.
[이성만 형제 우애의 현장]
이성만 형제에 대한 세종의 포상은 1420년 정월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비문에 의하면 이성만 형제 효행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1418년 11월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의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세종 즉위 직후 전국에 교서를 내려 효자, 절부(節婦), 순손(順孫)을 찾아 보고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수백 명이 보고되었는데, 그중 왕과 좌, 우의정이 함께한 서류 심사를 통하여 41인을 뽑은 것이다. 우애비의 비문에 의하면, “효자 대흥호장 이성만과 이순 등을 왕[세종]이 불러들이고 마을에 정문을 내려, 자자손손이 삼가 가풍을 지켜 떨어뜨리지 말고 힘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포상자 41인 중 이성만 형제의 이름은 가장 먼저 올라와 있고 이성만 형제만이 ‘호장’이라는 명칭으로 칭해지고 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라는 것은 포상자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이성만 형제는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까지 살았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포상을 받은 1420년으로부터 28년 전 조선조가 건국하였으므로, 만일 포상 당시 이성만의 나이가 50이었다고 가정하면 이성만이 23세 때 고려가 멸망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만 형제가 살던 마을은 대흥현의 치소인 상중리이다. 대흥 상중리는 백제시대의 임존성으로서 백제부흥운동의 치열한 전투 현장이었고, 이후 고려, 조선 1,000년 간 사또가 버티고 있는 관아 고을이었던 셈이다. 1497년에 세워진 이성만 형제 우애비는 현재 대흥관아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1420년 포상으로부터 거의 80년이 지난 1497년에야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비석의 건립자, 글쓴이, 지은이 등의 기록도 없이 건립 연대만 표시되어 있고, 글씨체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글자의 크기가 고르지 않으며 글자체도 정자 대신 간자[약자]가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興, 万, 仝, 淂], 이두식 표기도 나타난다. 대흥 사람들이 이제는 잊혀 가는 이성만 형제의 효행을 기려 이를 기념하고 동시에, 효행 마을로서의 자부심을 확인하고 후손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비석을 건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45㎝ 정도인데, 원래는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던 가방교 부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예당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197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1983년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2호로 지정되었다.
이성만 형제 우애의 또 하나의 현장은 형제가 농사지었던 들판이다. 벼를 논에서 서로 옮겨 다니던 것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데 그 논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비석의 원래 위치, 혹은 지형상의 조건에서 볼 때 형제의 논은 틀림없이 지금 예당저수지로 수몰된 지역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당호는 아름다운 경관만이 아니라 의좋은 형제가 농사짓던 논두렁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옛날이야기에서 ‘옛이야기축제’로]
예산군에서는 2002년 충남발전연구원에 위탁하여 예산 지역의 효행 관련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사업의 일부로 이성만 형제에 대한 사적이 새삼 주목되었으며, 이후 예산군에서는 이를 지역의 콘텐츠로서 활용하는 노력을 하였다. 2002년 상중리 대흥관아 앞에 이성만 형제의 우애를 표현한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2008년 이후 ‘예산옛이야기축제’를 개최하여 우수 축제로서 평가를 받았다. 또 이 마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활용하여 2009년 예산 대흥이 ‘슬로시티’로 지정을 받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성만 형제의 효행과 우애에 음식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퍽 흥미 있다. 예산은 원래 물산과 먹거리가 풍부하여 음식으로 이름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예산 한우갈비, 혹은 삽다리곱창, 매운탕과 민물어죽 등의 음식이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근년 ‘먹방’으로 명성을 날린 백종원 이사장이 예산 출신 인물이기도 하다. 이성만 형제의 이야기에 들어 있는 음식의 명성은 예산의 역사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성만 형제에 대한 역사의 현장은 1964년 예당저수지의 완공에 의하여 크게 환경이 변화되었다. 원래는 수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농경지가 확보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대흥의 참외는 특히 유명하여 크기가 사람의 머리통 만하여 지게로 져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만큼 땅이 비옥하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둘레 40㎞에 이르는 대규모 저수 시설의 조성에 의하여 이성만 형제의 생활과 효행과 우애의 공간들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근년 예당저수지를 새로운 관광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과 함께 지역민들의 노력은 이성만 형제의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고 있다. 이성만 형제 콘텐츠를 활용한 대흥의 ‘옛이야기축제’가 더욱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지역 축제로 발전하고, 또한 축제 참가자들이 이성만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성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식’의 콘텐츠가 예산의 지역 유산으로서 적극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