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1526
한자 百濟復興運動-任存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윤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있는 산성으로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종말을 같이 한 중요한 거점.

[개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임존성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에 있으며, 현재 사적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은 외벽을 돌로 쌓고 내벽을 흙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660년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에 이르자 백제는 7월 18일 항복하여 너무도 맥없이 무너졌다. 큰 저항도 하지 못했던 중앙귀족과 달리 당나라의 지배가 현실화되자 지방의 귀족과 유민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치열했던 3년간의 전투,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임존성의 거병은 백제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임존성이 함락됨으로써 부흥운동의 마지막 불꽃이 스러져갔다. 이처럼 임존성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이었다. 복신도침 그리고 부여풍이라는 지도자도 중요하지만 임존성의 흥망을 같이 한 인물로는 흑치상지를 들 수 있다. 임존성이 이처럼 부흥운동의 아이콘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천혜의 요새와 왕도와 바닷길로 이르는 교통로의 중심지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비록 임존성은 함락당하였지만 여전히 지역민들에게는 구전을 통하여 살아 숨 쉬고 있다.

[백제부흥운동의 산실이 된 천혜 요새, 임존성]

백제부흥운동의 시말(始末)이 된 임존성은 어떻게 해서 백제부흥운동의 산실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먼저, 백제에서 예산 지역이 차지하는 지리적 이점에 있다.

예산은 서쪽에 가야산을 경계로 서산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에는 차령산맥이 있다. 동서에 산지가 있는 지형으로 상대적으로 넓은 대지는 군의 중앙에 형성되어 있다. 하천망은 복잡하지 않고 아산만을 향해 북쪽으로 흐르는 두 줄기의 삽교천무한천이 젖줄이 된다.

백제시대에 특히 중요한 물길은 무한천이다. 무한천은 차령산맥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예당저수지를 거쳐 삽교천과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향하는 53.9㎞의 하천이다. 청양-예산 등을 지나 아산만에 이르기 때문에 금강이 막혔을 경우 백제의 도성이었던 부여에서 아산만에 이르는 길이다. 자연지형으로 보면 산지에 둘러싸여 있고 하천이 복잡하지 않아 외부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환경이다. 또한 용수의 확보와 곡간 평야의 발달로 인한 식량의 확보도 용이하다. 이러한 천혜의 환경과 도성을 압박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종말을 같이하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예산 임존성은 일부에서 달리 보기도 하나 대부분 대흥면 봉수산 정상부에 자리한 봉수산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봉수산성은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봉수산에 위치한 연고로 붙여진 명칭이며, 현재는 사적 90호로 지정되어 임존성으로 불리고 있다. 임존성은 동서로 나란히 이어진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에워싸며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은 외벽을 돌로 쌓고 내벽에 흙을 섞어 쌓아 만들어졌다. 조사에 의하면 적어도 3번 이상의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파악된다. 임존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형태로 전체 둘레는 약 2,450m에 이른다. 성벽의 대부분은 붕괴된 상태이지만 4.2m 가량 성벽이 남아있는 구간도 있다. 성문은 동·남·북문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20여 곳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봉수산성을 임존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확실한 근거는 지표조사에서 ‘임존(任存)’ 또는 ‘임존관(任存官)’이 찍힌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백제 토기편과 기와편이 조사되었다. 이는 백제시대에 임존성이 운영되었다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백제시대 이후의 흔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토기편과 기와편, 조선시대 자기편이 조사되어 전시대에 걸쳐 산성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임존성에서 뚜렷한 백제시대 성벽이 확인되지 않았고 수습된 백제 유물의 양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산성을 주목하는 연구도 있다. 임존성으로 달리 추정되는 곳은 인근의 상중리 석성신속리 토성이다. 상중리 석성은 둘레 250~300m의 테뫼식 석성이다. 정상부에 평탄한 대지가 있어 건물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백제의 무문기와와 격자문, 어골문 계통의 기와가 수습되어 백제시대에 중요하게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속리 토성예당저수지에서 8㎞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백월산에 있다. 산성은 서북쪽 계곡을 감싸는 형태인데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가 2곳에서 나왔다. 두 성 또한 예당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무한천변을 장악하는 요로이며, 백제 유물과 건물지가 나오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존성은 어느 성으로 보아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두 성 모두 예당저수지를 사이로 임존성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신속리 산성에는 임존성에서 항전하던 백제군이 패한 뒤 토성을 쌓고 항전한 곳이라는 구전도 전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대흥 일대에서 있었던 항전이 전해진 것이라면 두 산성도 큰 권역에서는 임존성의 방어권으로 묶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의 봉수산성을 임존성으로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임존성은 하나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보조성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산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방어이며, 이를 위해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의 확보가 필요하다. 임존성은 좋은 조망권을 바탕으로 홍성과 예산 일대를 방어하기에 유리하며, 무한천 방향을 물길을 막기에도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더욱이 무한천을 통해 아산만에 이르러 외부와의 통할 수 있는 바닷길이 열려 있으며, 홍성과 청양을 거쳐 웅진도독부를 압박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처럼 방어와 팽창에 유리한 임존성의 인문지리적 환경을 종합하여 볼 때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의 기치를 올린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부흥국의 탄생과 임존성]

백제 멸망 무렵 7세기 중반 동아시아는 동서와 남북 진영이 충돌하는 양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일방적으로 형성된 구도였다. 7세기 들어 중국을 통일한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다. 그렇지만 수나라는 무리한 팽창주의로 급격히 무너지고, 이를 대신하여 당나라가 수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당 역시 팽창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수의 패망을 교훈삼아 서두르지 않았다. 전형적인 기미(羈縻) 정책으로 당의 질서를 따르면 선이요, 당에 반항하면 악이며 정벌의 대상이었다. 이에 서서히 주변을 옥죄면서 복속을 강요하였다. 이에 수와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던 고구려와 당의 충돌은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다. 반면 백제와 신라는 642년 대야성 전투 이후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항복한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백제 장군 윤충에게 죽게 된 원한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는 신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통하고, 고구려 또한 당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한반도에서 안정이 필요하였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고구려와 백제가 통하면서 왜와 돌궐까지 가세하여 당과의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다. 반면 신라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당에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편 결과 당과 신라의 군사 동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버거운 상대인 고구려보다는 먼저 백제를 공격하는 우회 전술을 택하였다. 백제의 멸망은 이와 같은 동아시아 정세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자 백제는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 결사대가 항전했지만 헛되이 끝나고, 소정방이 이끈 나당연합군에게 도성이 함락되며 660년 7월 18일 멸망하고 만다. 허망하였던 백제의 멸망에는 외교 실패, 내부의 권력 다툼, 국가 시스템 등의 여러 문제가 거론된다. 다만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은 중앙정부만의 붕괴였지 백제 전역이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고스란히 백제의 전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백제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백제부흥운동은 초기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임존성이 있었다. 백제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지휘하고 전투를 주도한 인물로는 백제의 왕족 출신인 복신과 승려 도침, 무장인 흑치상지를 들 수 있다. 무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흑치상지임존성으로 합류하며 열흘 만에 3만여 명이 모일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였다. 임존성을 중심으로 백제부흥군은 전열을 정비해 사비 탈환을 시도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은 661년 3월 두량윤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의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남방 지역의 여러 성이 호응하여 백제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복신도침은 백제 왕실의 정통을 가진 왕자 풍을 일본에서 모셔와 국왕으로 추대한다. 당시 복신도침은 주류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풍을 왕으로 모시고 피성으로 천도하여 명실상부한 백제 부흥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 부흥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승리의 샴페인을 먼저 터트린 것일까? 부흥군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복신도침을 살해하고, 완충 작용이 없는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은 풍전등화였다. 이전까지 부흥운동의 기세에 눌린 당군은 철수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으나 되살아났다. 반면 부흥군은 지도부가 갈등을 겪는 사이 급격히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부흥군은 당군에게 동방 거점을 빼앗기고, 신라군에게 남방도 함락되면서 피성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피성이 위태롭게 되자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근거지를 다시 옮기고 결국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며 지도부의 분열 양상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나당연합군이 7월 전면적으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부흥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 백강전투]

663년 8월 27일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인 백강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의 분열을 틈타 백제의 심장인 주류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에 맞서 왜의 구원군이 백제 부흥국에 합류함으로써 한반도, 중국 그리고 일본 열도의 세력들이 백제의 운명을 놓고 결전을 벌인 것이다. 이때 백제 부흥국을 구원하기 위한 왜군의 규모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2만 7000명이 파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내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1,000여 척으로, 중국 기록인 『구당서』 유인궤 전에도 400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왜가 사활을 걸고 부흥군을 지원한 것이다. 이에 당군은 170척의 배를 이끌고 백강에서 왜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강의 상황이 이러하자 부흥군과 신라군은 육지에서 서로의 동맹군을 엄호하여 백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국면이 펼쳐졌다.

백강전투는 불과 이틀 만에 끝났다. 진입하려는 왜군과 당군이 총 4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일방적인 당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당군은 율령군으로 훈련을 받은 부대이기 때문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반면 왜군은 호족 연합군으로 임시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오합지졸이었고, 작전도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당군은 미리 전술적으로 백강의 폭이 좁은 점을 파악하여 요로를 장악한 뒤 화공으로 공격해 왔다. 강의 흐름까지 썰물로 바뀌게 되자 왜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수적에서 훨씬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완패한 것이다.

이처럼 7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정세는 혼돈 그 자체였다. 당의 팽창주의에 맞서 거역한 백제가 기어이 희생의 제물로 받쳐진 것이다. 문제는 백제 편에 가담한 나라들의 향방이었다. 왜군이 백강전투에 참여한 이유는 백제와의 친연관계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백제가 무너지게 되면 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큐슈 지역에 축성된 미즈키성[水城]과 오노죠[大野城]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왜가 얼마나 당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백강전투의 패배는 자연스럽게 부흥군의 와해로 이어졌고 결국 663년 9월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마저 항복하고 만다.

[임존성의 흥망, 흑치상지]

이제 남은 성은 유일하게 임존성만 있었다. 임존성백제부흥운동의 기치를 내건 시작이 되었고, 불꽃이 꺼져갈 때 끝까지 살아남아 불씨를 되살리려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처럼 임존성이 부흥운동의 아이콘이 된 것은 천혜의 요새라는 전략적 요인이 무엇보다 크지만 운명을 같이 한 장군 흑치상지의 행보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흑치상지는 백제 인물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고, 중국 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잘 알는 인물이다. 이는 그만큼 백제부흥운동을 이끄는 데 흑치상지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흑치상지흑치상지의 묘지명에 의하면 조상이 부여씨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부여씨가 백제 왕성(王姓)임을 고려하면 흑치상지 가문은 왕계에서 분리된 상당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16관등 중 2품에 해당하는 달솔을 대대로 역임하였다는 것은 그 위세를 말해 준다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흑치상지가 백제의 서부(西部)인이었으며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다는 인물 평과 함께 백제가 멸망하자 예하의 군을 이끌고 도망 온 사람들을 모아 임존산을 지키며 목책을 쌓아 방어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흑치상지가 백제의 서부인이라는 점이다. 서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부인이 서쪽 출신임을 표시한 것이라면, 흑치상지가 이 때문에 백제의 중요한 요새인 임존성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복신도침이 부흥운동의 지도자라면 흑치상지임존성을 이끄는 장수였던 것이다. 흑치상지의 가세로 백제 부흥군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임존성이 초기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을 말해 준다.

임존성이 함락된 시점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흑치상지가 663년 당군에 항복하여 임존성을 등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복신도침을 죽이고, 복신마저 부여풍에게 죽음을 당하는 부흥군 내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이를 노려 당군은 백제 부흥군을 양분하려고 노력하였다. 흑치상지의 입장에서 백제가 멸망하자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분연히 봉기하였다. 모두가 합심하여 백제를 부흥시켰지만 지도부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임을 당하는 내분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처럼 백제부흥운동의 순수한 마음이 사라졌다면 누구나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였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 틈을 당군이 파고 든 것 같다. 흑치상지 또한 백제부흥운동의 명분이 사라진 시점에 대의보다는 자신의 몸과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가 나당연합군에 가담하자 상황은 악화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임존성을 이끌었으며 부흥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흑치상지에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수진으로 임존성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항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임존성, 끝나지 않은 신화]

백제 부흥국의 중심지인 주류성의 항복으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바로 임존성이었다. 임존성에서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항거한 인물은 지수신이다. 지수신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의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나당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피하고자 하였다. 나당연합군 또한 파죽지세의 기세로 공격하였다. 10월 21일부터 나당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지수신이 이끈 임존성은 이를 효과적으로 막았고, 11월 4일에는 마침내 나당연합군을 퇴각시켰다. 하지만 부흥군의 안도도 잠시, 임존성은 재차 공격받게 된다. 이에 지수신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임존성은 함락당하였다. 마지막 백제부흥운동의 불꽃이 스러져 간 것이다. 이처럼 3년간의 치열했던 백제부흥운동임존성에서 종말을 고한다.

백제부흥운동의 시말을 함께한 임존성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살아 있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 보루였던 임존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을 모신 소도독사가 건립된 것은 지역 주민들의 기를 억누르고, 백제의 멸망이 중국에 의한 불가항력이었다는 관념을 주입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또한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에는 원수봉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나당연합군이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산세가 험하여 효과적으로 막아 내는 부흥군에게 번번이 격파당한다. 그런데 흑치상지가 나당연합군에 가담하자 임존성과 마주하고 있는 높은 봉우리를 먼저 차지한 후 공세를 취하여 임존성을 공략하였다. 그래서 주민들이 이 봉우리를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라 하여 ‘원수봉’이라 부른 것이다. 지역민들에겐 여전히 임존성의 신화가 살아 있는 것이다. 또 임존성 주변에는 대련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죽은 영혼을 위해 창건하였다가 불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원수봉과 대련사의 구전은 치열했던 백제 부흥군의 저항과 나당연합군의 격돌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또한 나라를 되살리지 못한 백제 사람들의 한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듯 백제인의 기상과 항거의 정신은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사람들의 말과 말을 통해 구전으로 남게 되었다. 이는 백제 유민들의 기상과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치열했던 움직임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새겨져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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