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교사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2030
한자 興敎寺-
이칭/별칭 세달사,흥교사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로 680-11[흥월리 1083-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환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통일신라 - 흥교사 창건
폐지 시기/일시 조선 후기 - 흥교사 폐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 - 흥교사터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 흥교사터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2년~2013년 - 흥교사터 시굴 조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4년 - 흥교사터에서 금동불상 출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8년 - 흥교사터에서 청동여래좌상 출토
소재지 흥교사터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로 680-11[흥월리 1083-1]지도보기
성격 사찰 터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있는 통일신라의 절터.

[개설]

흥교사(興敎寺)의 원래 사찰명은 세달사(世達寺)이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 기록에서 궁예(弓裔)[?~918]의 초창기 세력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흥교사터는 1969년 학계에 처음 알려졌으며 1984년과 1988년 금동불상과 청동여래좌상이 각각 1점씩 발견되어 매장문화재로 신고되었다. 그동안 정확한 사찰명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매장문화재와 명문 와편 등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유적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3차례에 걸친 시굴 조사 결과 상당한 규모와 사격을 갖춘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문헌사적 검토가 이루어져 흥교사의 전신이 세달사였음이 밝혀졌다.

[변천]

흥교사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범우고(梵宇攷)』 등에서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서는 흥교사에 고려의 승려 충희(沖曦)의 비(碑)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흥교사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사세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윤순거(尹舜擧)[1596~1668]의 『동토선생문집(童土先生文集)』 3권에 기록된 시와 윤순거의 동생 윤선거(尹宣擧)[1610~1669] 등이 흥교사를 답사하고 남긴 시에서는 흥교사의 쇠락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17세기경에는 이미 흥교사의 사세가 약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흥교사터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1083-1번지 일원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흥교사터는 1998년과 2003년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2012년 영월 농어촌도로 204호선 도로 건설공사 부지 내 유적 시굴 조사가 시작되어 2013년까지 총 3차에 걸쳐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1차 시굴 조사는 도로 확장부지 2.080㎡ 정도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건물지 2기와 수혈유구 4기, 석렬 1기, 집수지 1기, 다량의 기와무지 두 곳이 확인되었다.

2차 시굴 조사는 1차 조사를 수행하였던 조사단에서 흥월리 1083-1번지 경작지 일대의 매장문화재가 훼손된 현황을 목격하고 관계 기관에 신고함으로써 긴급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대상지는 흥월리 1081번지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에 북쪽으로 접한 경작지 6.630㎡ 규모이다. 조사 결과 건물지 6기와 수혈유구 2기, 석렬 8기, 배수로 1기로 총 17기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집수지로 추정되는 저습지 한 곳이 확인되었다.

3차 시굴 조사는 2차 조사 구역의 경작지와 남쪽으로 밭둑을 경계로 하는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 운동장 일원에서 이루어졌다. 앞서 조사되었던 유구들이 남쪽으로 연장되고 있었고, 학교 운동장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건물지 부재와 초석 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월초등학교 흥교분교 운동장 일대가 중심 사역일 가능성이 높아 학술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조사 면적은 운동장을 중심으로 2,274㎡ 정도이다. 3차 조사에서는 총 5기의 트렌치에서 건물지 5기, 탑지 1기, 기단 1기, 석렬 3기, 수혈유구 6기와 석탑 기단면석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총 3차에 걸친 시굴 조사에서 많은 양의 기와류, 전돌류. 자기류, 토기류가 확인되었다.

[현황]

흥교사터의 1·2차 시굴 조사 지역은 복토된 상태이고 일부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3차 시굴 조사가 끝난 뒤 복토되었고, 3차 시굴 조사 구역 주변으로 많은 양의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또한 운동장 옆으로 길이 150㎝ 내외의 장대석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기록된 승탑 1기는 현재 보이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흥교사터는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매장문화재와 명문 와편 등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3차에 걸친 발굴조사, 시굴 조사 특히 문헌사적 검토가 이루어져 흥교사의 전신이 세달사였음이 밝혀졌다. 흥교사의 옛 이름인 세달사는 이광수의 소설 「꿈」의 주인공 조신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어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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