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1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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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Roman Catholic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춘동 |
[정의]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설]
천주교의 공식 명칭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또는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이다.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정통 교의(敎義)인 절대자이자 창조자인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천주교는 교황(敎皇)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와 로마 가톨릭교로부터 독립한 그리스 정교로 구분된다.
‘천주교’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번역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초 중국으로 파견된 연행사(燕行使)에 의해서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1784년에 세례 교인이자 신부인 이승훈(李承薰)이 탄생하였다.
[한국의 천주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알려진 것은 17세기 초 연행사(燕行使)에 의하여 천주교의 존재가 알려지면서였다. 연행사들은 천주교를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알려진 ‘천주교’는 선교사 없이 서학서(西學書)에 의존하여 천주교 신앙으로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다가 1784년에 이승훈(李承薰)이 프랑스인 신부 장-조제프 드 그라몽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아 우리나라의 첫 천주교 신부가 생기게 되었다.
국내로 귀국한 이승훈은 서학에 조예가 깊은 이벽(李檗), 권일신(權日身)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의 천주교의 신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천주교 신앙의 핵심인 ‘인권의 평등사상’은 당대인들에게 호응을 얻어 교세가 커졌다. 이처럼 확산세에 있던 천주교는 우리나라에서 시련을 겪게 된다. 그 사건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이다.
신해박해는 조상의 위패를 불살랐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는 첫 박해의 사례였다. 그리고 신유박해는 당시 남인 세력과 서인 세력 간의 정쟁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신유박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한 많은 남인 계열의 사람들이 처형당하였다. 마지막으로 병인박해는 당대 조선을 침략하였던 서양 세력과 천주교를 동일시함으로써 생긴 박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1876년 5월 20일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등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전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영월의 천주교 및 현황]
강원도의 천주교는 춘천교구와 원주교구에서 총괄한다. 영월 지역은 원주교구에서 관리하는 영평정지구[영월, 평창, 정선]에 속한다. 그러나 영월은 제천 지역과도 밀접한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제천지구에서도 영월 지역의 교구를 관리하고 있다.
2019년에 파악된 영월 지역의 천주교회는 성당 2개소, 공소 3개소이다. 성당은 영월 천주교회[수녀원 포함], 주천 천주교회, 영월 본당 마차공소, 황지 본당 상동공소, 의림동 본당 쌍용공소이다.
영월 천주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영월 지역은 담당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인 기도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후 신도가 늘어나자 공소(公所)가 생기고, 다시 현재의 본당이 만들어졌다.
주천성당의 경우, 1940년대 주천면 도천리 벌말에 거주하는 이재수가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천주교 기도 모임을 갖고 천주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신도가 급증하자 1957년에 용소막성당 관할 공소가 생겼다. 이후에 본당으로 승격하고 초대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마차공소의 경우, 1950년대 마차 지역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 모임을 갖고 신도의 숫자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화본당 보좌 이영섭 방지거 신부가 마차 지역을 방문하여 기도를 주관하였고, 이후에 더 많은 신도가 발생하자 공소를 설치하고 다시 성당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다.
황지본당 상동공소의 경우, 1950년대 텅스텐 광산 사업에 종사하는 지역민들이 모여서 기도 모임을 드리다가, 신도의 숫자가 급증하여 현재의 공소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영월 지역의 천주교 신앙은 자발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