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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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容俊 |
영어공식명칭 | Kim Yong-j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김용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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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용준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용준 태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김용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용준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김용준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거주|이주지 | 김용준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
활동지 | 김용준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용준(金容俊)[1873~1932]은 1919년 4월 9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가계]
김용준은 1873년 6월 1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활동 사항]
김용준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에서 열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이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이 커지고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신들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장소는 인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풍기장터로 정하였으며, 1919년 4월 9일 장날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용준은 이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안용호 등이 주도하는 만세시위운동에 나가 참여하였다. 김용준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때 순찰 중이던 풍기주재소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안용호·최성원·남영진 3인을 주동자로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김용준은 이 모습을 보고 시위 군중 50여 명을 선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입구 동남쪽으로 행진해 갔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안용호 등을 붙잡아 간 일본군 헌병과 수비병들이 다시 달려 나왔다. 이때 김용준은 같은 마을의 황정흠(黃鼎欽)[1889~1955]·황정흠(黃政欽)[1881~1949]·남상필(南相弼)[1891~1972]·이화백(李和伯)[1884~1968]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용준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고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김용준은 199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