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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35
한자 安敬根
이칭/별칭 석천(石泉),안관오(安冠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6월 10일연표보기 - 안경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쓰촨성 노주군관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운남군관학교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해삼위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2월연표보기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황포군관학교의 구대장으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연표보기 - 임시 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됨
몰년 시기/일시 1978년 12월 9일연표보기 - 안경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음
출생지 황해도 신천
학교|수학지 노주군관학교 - 중국 쓰촨성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석천(石泉). 일명 안관오(安冠五). 안중근(安重根)의 사촌 동생이다.

[활동 사항]

안경근(安敬根)[1896~1978]은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박은식(朴殷植)·안정근(安定根)·신채호(申采浩)·이범윤(李範允)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삼위는 사촌형 안중근이 1918년 망명하여 독립 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2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인하여 자주 독립운동에 어려움이 커지자 활동지를 상하이[上海]로 옮겼다. 안경근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金九)와 의기투합하고 그를 적극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가담하여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3년 동지들의 권유로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쓰촨성[四川省]의 노주군관학교(瀘州軍官學校)에 입학,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1925년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마친 후 임시 정부 요인들과 국권 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안경근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활동하면서 만주에서 독립 투쟁에 종사하였다.

1929년 3부 정의부,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등 통합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 통합적 차원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독립 투쟁의 역량을 저해·약화시킨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는 달리 남만주의 국민부(國民府), 북만주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양립되었는데 이는 이해관계에 얽혀 통합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일제의 주구와 일본군 그리고 공산당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당의 소행으로 김좌진이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안전지대인 국제 도시 상하이로 돌아와 활동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는 만주 일원에서의 독립 투쟁이 불리해지고 압박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1930년 상하이로 돌아온 안경근은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김구·이동녕(李東寧) 등 임시 정부 요인과 협의를 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침체 국면에서 허덕이던 임시 정부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안경근남경(南京) 등지에서 군관 생도(生徒) 모집에 주력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가 개교됨에 따라 직접 학생을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한인들의 맺힌 한(恨)이 풀어지는 것은 일본 총영사관 소속의 친일파 주구인 밀정 이종홍(李鍾洪)을 교살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종홍은 상하이 거주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혀 온 자였다. 이듬해 남경에서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장에 김구, 참모장에 안공근(安恭根)을 선출해 한국독립군특무대(韓國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안경근은 군관 학교 졸업생 등과 함께 대원이 되었다. 또한 1934년 한·중 간 친선을 도모하는 데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김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크게 기여하였다.

1936년 11월 10일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39년 10월 임시 정부가 쓰촨성 치장현[綦江縣]으로 이주한 후에 다시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補選)되어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 임시 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이해 귀국하였고, 1978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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