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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482
한자 古文獻
영어의미역 Old Literatur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집필자 이병훈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과 관련하여 1945년 이전에 제작된 문서와 책·기록 등 현존하는 모든 서책류.

[국내 편찬 고문헌]

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인종 23) 김부식(金富軾) 등이 삼국시대 문헌과 사서(史書)에 의거하여 편찬한 사서이다.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조 등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2. 『고려사(高麗史)』

독도와 관련한 기록은 「지리지」에 보이며, 세가(世家)에는 울릉도와 우산국에 대한 기록뿐이다. 따라서 독도에 대해서는 울릉도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태종실록(太宗實錄)』과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등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1년(중종 26) 편찬된 책으로, 강원도 울진현 산천조에 울릉도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5.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아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간행된 것은 1908년이다. 「여지고(輿地考)」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6.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비변사에서 1617년(광해군 9)부터 1865년(고종 2)까지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승정원일기』·『일성록』 등과 함께 실록보다 앞서는 기본적인 역사 자료이다. 고종 21년 1월 6일과 11일조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7.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명을 담당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과 취급하였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숙종 23년 4월 13일조와 고종 18년 5월 22일조, 고종 19년 4월 7일조, 고종 32년 1월 29일조 등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8. 『일성록(日省錄)』

1760년(영조 36) 1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일기이다. 임금이 국정을 파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로서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은 고종 18년 5월 22일조, 고종 32년 1월 29일조 등에 나온다.

9. 울도군수 심흥택 보고서(鬱島郡守 沈興澤 報告書)

1906년 3월 26일, 일본은 시마네현 사무관[제3부장]을 책임자로 하고 관민 45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조사대를 죽도[독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독도에 도착하여 서도·동도를 차례로 조사한 뒤 3월 28일 울릉도에 상륙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울릉도 소속의 독도, 즉 석도(石島)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놀라운 통보에 접한 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 29일 이에 항의하며 이 사실을 직속 상관인 강원도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강원도관찰사 서리 춘천군수 이명래가 1906년 4월 29일자로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호외」에 수록되어 있다.

10.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으로 역사·경학·천문·지리·불교·도교·서학(西學)·예제(禮制)·재이(災異)·문학·음악·음운·병법·광물·초목·어충·의학·농업·광업·화폐 등 총 1,417항목에 달하는 내용을 변증설(辨證說)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해설하고 있다.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에서 평민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를 우리 영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11.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翼)이 평소에 기록해 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1740년경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것으로, 형식적 특징은 백과전서적인 포괄적 구성에 있다. 「울릉도조(鬱陵島條)」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12. 『변례집요(邊例集要)』

1598년(선조 31)부터 1841년(헌종 7)까지 일본인의 내왕 상황과 사송(使送) 선박, 무역 관계, 표류자 송환, 여러 규정·조약, 왜관관사(倭館館事), 일본인의 요구, 잠상(潛商)·잡범(雜犯) 관계 등을 광범위하게 수록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일본의 교린 경위가 기술되어 있어 조선시대 대일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이 임진왜란 후에도 울릉도에 대한 쇄환 정책을 계속 시행하자 대마도주가 중심이 되어 울릉도를 침탈해 보려는 시도를 시작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13. 『지봉유설(芝峰類說)』

임진왜란 당시 울릉도가 일본인들에게 노략질을 당하였으며, 그 이후 이수광의 시대까지는 조선인들이 들어가 정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오히려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기죽도(磯竹島)라고 부르면서 침략 점거한 일도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14.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이규원(李奎遠)이 1881년(고종 18) 음력 5월 23일 울릉도검찰사에 임명된 후, 다음해인 1882년 4월 7일 국왕을 알현하고 구체적 명령을 받은 후 울릉도를 조사 검찰하고 돌아와 1882년 6월에 국왕에게 올린 조사보고서의 초고본이다.

15. 「울도기(鬱島記)」

우용정(禹用鼎)이 1900년에 울릉도시찰위원으로 일본측 책임자와 함께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들의 침입과 도벌 실태를 조사 보고한 시찰 경위와 보고서이다. 우용정은 서울로 귀환하자 보고서를 냄과 동시에 울릉도의 「호구성책(戶口成冊)」 1건, 「기간성책(起墾成冊)」 1건, 「일본인결막인구성책(日本人結幕人口成冊)」 1건, 「일본인범척규목성책」 1책, 「본도인범척성책」 1건, 「감무보고」 1건, 「본도등장」 2건, 「일본인사실」 1건을 내부에 제출하였다.

16. 『내부거래안(內部去來案)』

내부(內部)에서 외국과의 공문서를 주고받은 사실을 기록하여 정리해 놓은 책이다.

17. 『관보(官報)』

1894년(고종 31) 김홍집 내각이 갑오경장을 일으켜 국정을 쇄신하던 시기에 펴낸 한국 최초의 관보로서, 6월 21일에 시작하여 4976호까지 간행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과 더불어 폐간하였다. 제962호[광무 2년 5월 30일]와 제1448호[광무 3년 12월 19일], 제1716호[광무 4년 10월 27일] 등에 울릉 지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18. 「선격양미잡물용입가량성책(船格粮米雜物容入假量成冊)」

중앙 정부가 울릉도를 재개척하기로 결정한 후,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받고 강원도관찰사가 1883년 4월 울릉도 재개척을 시작할 때 제일차로 필요한 물자의 준비를 중앙 정부에 보고한 기록이다.

19. 「강원도 울릉도 신입민호인구성명연세급전토기간수효성책(江原道 鬱陵島 新入民戶人口姓名年歲及田土起墾數爻成冊)」

1883년 7월 현재 울릉도에 들어와 정착과 개간을 시작한 민호와 인구의 상황을 강원도관찰사가 중앙 정부에 보고한 기록이다.

20. 「오하기문(梧下記聞)」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1906년 음력 4월에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인 한국 영토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거부한 자료이다.

21. 『매천야록(梅泉野錄)』

조선 말기의 학자 황현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까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편년체로 기술한 사서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에도 일본이 자기의 영토가 되었다고 강제로 칭하고 조사해 갔다고 항론을 펴고 있다.

22.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이 1908년에 전 4권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 자료가 편찬된 시기는 대한제국이 일제 통감부의 지배하에 들어간 시기이다. 이 때문에 농상공부에 투입 고용된 수산과장 등 일본인 관리들이 일제 통감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대한제국에 속한 섬들을 실지 답사해서 그 위치와 지세, 산물 등을 세밀하게 조사한 후 일본어로 출판한 것이다.

일제가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현에 ‘영토 편입’한다면서 ‘죽도’라는 이름을 붙인 3년 후에 간행된 책이어서 일본어판에서는 독도죽도(竹島)라고 불렀으나, 대한제국 정부와 언론이 이에 항론을 펴자 울릉도에 이어 죽도 역시 대한제국의 강원도에 속하는 섬임을 명백히 밝혀두었다.

2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서리(署理)의 보고(報告)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를 받은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李明來)가 이를 다시 중앙 정부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에게 보고한 자료이다.

[국외 편찬 고문헌]

1. 『권기(權記)』

울릉도가 최초로 나오는 일본의 고문헌으로, 관홍 원년조(1004년)에 울릉도 사람들이 인바주[因幡州]에 표류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1725년 대마도의 마츠우라 마사타다[松浦允任]가 지은 것으로 총 10권으로 되어 있다.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3. 『백기민담기(伯耆民談記)』

일본 호키주[伯耆州] 요나고[米子]의 오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이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다가 다시 취소되고 도해가 금지된 경위를 밝힌 기록이다. 당시 죽도는 오늘날의 울릉도를 지칭하였다.

4. 『교린고략(交隣考略)』

1693년(숙종 19) 대마도주가 에도 막부의 명에 따라 안용복과 박어둔을 조선에 송환하면서 조선 영토인 울릉도[죽도]를 일본 영토로 탈취하려다가 실패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5. 「공문록(公文錄)」

죽도(竹島)를 조선 영토로 결정한 1696년의 에도 막부의 결정 내용을 조선에 알려온 일본 외교문서이다.

6. 「죽도기사(竹島紀事)」

일본의 에도 막부와 조선 정부 간의 죽도의 조선 귀속과 일본 어민의 출어 금지에 대한 왕복 문서 기록이다.

7. 「초려잡담(草廬雜談)」

일본의 민간인이 항간에서 떠도는 내용을 채록한 기록으로, 죽도는 원래 일본 땅인데 1696년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 때 조선에서 조선 땅이라고 말해 왔으므로 죽도를 조선에 주었다는 내용이다.

8.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일본 기록에서 송도(松島)[독도]에 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료이다. 1667년 일본 오키 지방의 번사였던 사이토 호센[齊藤豊仙]이 편찬한 것으로, 오키 사람이 바다를 표류하던 중에 본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9.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

에도시대 후기의 경세사상가로 이름난 하야시 시헤이[林子平][1738~1793]가 1785년 일본, 조선, 유구[현 오키나와], 에조[현 홋카이도 북반부] 등 4국의 위치와 관계, 주변 각국의 지리 및 풍속을 소개한 군사지리서이다. 오늘날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독도가 분명히 조선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0. 『죽도도설(竹島圖說)』

기타조노 미치안[北園通葊]이 오키[隱岐]의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편찬했다고 한다. 일본측에서 송도[독도]가 일본령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독도영유권의 근거로 내세우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직접 실견하고 쓴 책이 아니라, 이전에 근거없이 떠도는 자료와, 과거 죽도에 들어간 적이 있는 어부들의 구술을 모아 집필하였기에 송도와 죽도에 대한 지명 등이 불분명하다.

11.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1894년에 최초로 『조선수로지』를 편찬 발행했는데, 이때 독도를 ‘리앙코르열암(列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수로지』 제4편 조선동안(朝鮮東岸)에 포함시켰다. 여기서는 “울릉도[일명 송도]는 조선 강원도 해안에 위치해 수목이 울창한 섬이고 죽도는 울릉도 북동측에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라고 소개,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5편의 조선동안에는 1905년까지의 조사 결과들을 정리하였으며, 독도에 관한 기사도 종전의 것과 달리 편집되었다. 1911년 12월에 『조선수로지』는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 제6권으로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었는데, 이는 1910년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칭만 일본수로지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1907년 판과 거의 똑같다.

12.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圖所屬考)」

일본 외무성의 위촉을 받고 죽도의 영토 소속을 조사한 기타자와 세이세이[北澤正誠]가 1881년에 『죽도고증(竹島考證)』 3권을 쓴 다음 뒤이어 외무성에 보고한 1881년 8월 20일자의 보고서이다.

13. 「극비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진행된 러일전쟁과 관련한 기록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독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망루 설치 및 해로 조사, 시마네현 고시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14. 「사업경영개요(事業經營槪要)」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1910년에 작성하여 은기도청(隱岐島廳)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이다. 여기에는 6년 전인 1904년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생각하여 통감부(統監府)에 대하원(貸下願)을 제출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통감부(統監府)’는 1906년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착오이고, 나카이 요사부로가 1906년 3월 25일에 오쿠하라 후쿠이치[奧原福市]에게 진술한 바 독도를 한국 영토로 확신하여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제출하려 했다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즉 여기서 통감부는 한국 정부의 착오이다.

15. 「죽도급울릉도(竹島及鬱陵島)」

나카이 요사부로가 1906년 3월 25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여 자기에게 대하(貸下)할 것을 청원한 경위를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福市]에게 진술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16. 『시마네현지[島根縣誌]』

1923년 시마네현교육회는 『시마네현지』의 ‘죽도(竹島)’ 항목에서 "나카이 요사부로는 이 도(島)를 조선 영토라고 생각해서 상경하여 농상무성에 말해서 동 정부[한국 정부-인용자]에게 대하청원(貸下請願)을 하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 「공문유취(公文類聚)」

일제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 결정에 의하여 독도를 침탈할 때, “독도는 무인도로서 타국이 이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形迹)이 없다”고 하여 ‘무주지(無主地)를 선점’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18. 「시마네현 고시 제40호[島根縣 告示 第40號]」

일본 정부가 독도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일본 정부는 1905년 2월 15일 훈령 87호로 독도 영토 편입에 관한 내용을 시마네현지사에게 통고하였고, 현지사는 1905년 2월 22일 대외 공표로 소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고시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라 칭하고 지금 본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지사 마츠나가 다케요시”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 소장의 유일본인 이 자료는 고시용이 아니라 회람용에 불과하다.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현재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실제 고시되었다는 구체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시 일본 관보에도 게재되지 않았고, 신문에도 고시되지 않았다.

19. 「죽도고증(竹島考證)」

1693년부터 1699년까지 일본의 에도 막부와 대마도주가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를 영유하려다 결국 ‘조선 영토’로서 재확인하고 일본인의 출어를 금지한 경위를 간략하게 편집한 문건이다. 이를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69년과 1876년에 울릉도 및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재조사하려고 간략히 정리해서 일본 외무성 문서 안에 재편입시켜 놓은 것이다. 「죽도고증」에서 중요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의 부도인 「팔도총도」에 울릉도 서쪽에 그려진 우산(于山)을 그들이 독도를 칭했던 명칭인 송도(松島)라고 거론한 부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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