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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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영어의미역 | Potte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선사,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희돈 |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발견된 흙으로 빚은 선사시대의 그릇 종류 유물.
[개설]
울릉도 지역에서 조사된 고분군 출토 및 수습 토기는 크게 재지계로 보이는 적갈색 승문토기(繩文土器)와 경주계 토기인 회청색(灰靑色) 경질토기로 나눌 수 있다. 1957년 국립박물관 보고서에서 김원룡은 승문토기와 회청색 신라토기로 구분하고 전자는 섬 안에서 제작된 것이며 후자는 이사부의 정벌 이후 육지에서 유입된 것이라고 하였다.
[변천]
서울대박물관의 보고자들은 울릉도의 토기들은 무문토기·적갈색토기·신라토기로 구분하였다. 무문토기의 연대를 본토의 철기시대 전기 말경, 늦어도 서력 기원 전후의 전형적인 무문토기로 추정하고, 승문이 타날(打捺)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적갈색 토기는 새로 유입되는 신라토기의 영향을 받아서 생산된 토착적인 토기로 보고 연대도 6세기 중엽 이후로 비정하였으며, 회청색의 경질토기는 신라토기로 이사부의 정벌 이후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였다.
울릉도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 본토에서 신라토기가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현재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자료로는 6세기 중엽의 잔(盞),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그리고 6세기 후엽의 삼이대부완(三耳臺附盌), 단각고배(短脚高杯) 등을 들 수 있다. 현포동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향토사료관에 소장된 소형호에서 보이듯이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과 원문(圓文)이 시문된 6세기 후엽의 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의 초기 형식이 나타남은 물론, 7세기 이후의 다양한 인화문토기 조각,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속하는 장경병(長頸甁), 사각병(四角甁) 등이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6세기부터 고려시대 초까지 울릉도와 본토 사이에 이루어졌던 활발한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횡구식(橫口式) 석실의 축조 시기와 성격을 구분지을 수 있는 회청색 경질토기 즉 신라토기를 크게 3기로 다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1기에 속하는 토기는 향토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이대부완과 대부장경호, 단각고배와 남서동 고분 일대에서 채집된 대부장경호 동체 및 대각부(臺脚部)로, 6세기 중엽부터 울릉도에는 신라 즉 육지로부터 토기가 유입되어 들어왔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울릉도 제1기 토기류는 황룡사지의 1차 가람 기초, 늪 매립지, 폐토기무지 등에서 출토된 창건기 토기들과 유사한 형식들로, 경주 방내리 고분군에서 이 단계의 유구들을 확인할 수 있다. 향토사료관 소장의 소형 장경호는 선각(線刻)으로 된 삼각집선문+반원컴파스문과 이중 원문이 공존하는 인화문토기 초기 형식에 속하는 유물로,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정도로 판단된다.
제2기 토기류는 경주 안압지, 안압지 건물지 밑 출토품, 경주 손곡동 C-Ⅰ-2-9호묘 1·2차, 충효동 3·6호, 동해 추암동 B지구 가-26·37호묘 출토 토기들과 유사한 형식들로, 향토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현포출토 인화문장경병의단선화판 국화문+이중반원종장연속문의 문양을 통해 7세기 중반부터 8세기의 통일양식기 토기로 보고자 한다.
울릉도의 제3기 토기는 편병과 사각호, 대부완의 기종을 나타내며 대부분 북면의 천부리 고분군 출토 유물로, 지역 내의 유물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인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 출토 토기병과 유사하며 시기는 9C~10C, 즉 나말여초 시기로 청자 발생 시기 이전의 기형으로 본다.
울릉도의 횡구식 석실에서는 석실 내에 부장되었을 유물들이 대부분 도굴되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국립박물관 조사시 천부동 고분 2호의 경우 처녀분으로 내부에서 많은 토기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지역은 대부분 그 일대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 채집 자료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로, 출토지 미확인의 자료들이 대다수이다. 이외에 울릉도 횡구식 석실묘 내부에서는 토기 외에 금공예품이 출토된 예가 있으나 정확한 출토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영남대학교 고고학 보고자들은 울릉도의 토기를 크게 적갈색 연질토기(軟質土器)와 회청색 도질토기로 구분하였으며, 다시 적갈색 연질토기는 태토에 의해서 굵은 석립이 다량 함유된 조질 토기와 고운 점토로 제작된 정질 토기로 구분하였다.
도질토기는 앞의 회청색 신라토기와 일치하나 문제는 이러한 적갈색 연질토기 중에서 시기를 올려볼 것이 있는가 아니면 도질토기와 같은 시기의 토기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연질토기 중에서 일부는 도질토기와 함께 육지로부터 이입된 것이고 일부는 섬 내에서 육지 토기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6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울릉도식 고분이 축조되던 시기에 이 토기들이 유입되고 또 어떤 토기들은 섬 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문헌상에 나타나는 이사부 정벌 이전에 사용된 울릉도의 토기들에 대한 자료는 없는 셈이다.
최근 조사에서 육지에서 4세기대로 편년되는 토기편이 천부동 유물산포지에서 한 점 확인되었다. 비록 하나의 편으로 단언하기 어려우나 아마도 어디엔가 6세기 이전의 토착민들이 사용한 유물들이 있을 가능성은 있으며 자료의 발굴이 기대된다. 만약 6세기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들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 당시의 우산국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사회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는 울릉도와 같은 지형을 가진 곳은 퇴적량이 적은 지형이기 때문에 하나의 지층이라고 판단되는 곳에 앞선 시기와 늦은 시기의 유물들이 혼재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현포동 유물산포지의 경우 50㎝ 정도 되는 지층 속에서 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나 각각의 층에 여러 유물들이 섞여 출토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갈색 승문토기들을 6세기 이후로 판단하기도 하였는데 화산섬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이러한 지형에서의 유적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요구되며 이 역시 앞으로 울릉도 고고학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신라 복속 지역에서는 경주계 토기와 함께 재지계 토기가 발견되는 사례가 많으나 울릉도 지역의 경우 적색토기로 분류되는 성격 불명의 토기편들이 다량 확인되지만 기종을 확인할 수 있는 예가 없어 많은 자료의 수집이 요구된다.
[적색토기]
과거 울릉도 조사에서 천부리 고분군·남서리 고분군·남양리 고분군 등의 고분에서 여러 점의 적색토기들이 채집되었고, 현포리 유물 포함층에 대한 시굴 조사에서 다수의 적색토기들이 채집되었다. 적색토기들은 대부분 타날문이 나타나 있는 것이 보통이다. 타날문의 종류로서는 평행 타날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과거 보고서를 참고하면, 극소수의 격자문과 승석문도 발견되는 것 같다.
적색토기의 기종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며, 소형평저옹(小形平底甕)이나 발(鉢), 완(碗), 파수부완(把手附碗), 시루 등에 한정된다. 적색토기의 제작 기술 전통이 6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지만, 타날문 전통이 그 이전에 들어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타날의 형태만을 가지고 6세기 이전과 이후를 변별하는 일은 현재의 자료와 연구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가능성으로만 남겨져야 할 일이다.
본토에서는 타날문 적색토기류의 비중이 확실히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울릉도에서는 그 비중이 줄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 지역의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단편적인 보고이긴 하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 토기들을 참고로 비교해 보면 일상 용기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적갈색 연질계 산화염 토기들은 거의 소멸하고, 회색 연질계의 환원염으로 바뀌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본토의 적갈색 토기들은 적어도 6세기쯤 되면 다소 소성도(燒成度)는 낮더라도 정질(精質)의 태토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울릉도에서 채집된 적색토기들에는 태토에 굵은 사립(砂粒)이 많이 섞여 있어 본토의 토기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적색토기에서 자주 보이는 울릉도의 파수는 굵고 뭉툭한 특징을 보여준다. 6세기 중엽 경 이후 파수부(把手附) 적색토기들은 고분에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언하기 어렵지만, 양산 북정리 고분이나 안압지 출토 예를 참고하면 이름 그대로 긴 쇠뿔 모양에서 후대로 갈수록 짧고 뭉툭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회청색토기]
최근 조사 성과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에 하나는 과거의 울릉도 조사에서 확인된 토기류보다 시기가 한 단계 올라가는 회청색토기들이 확인된 일이다. 즉, 남서리 고분군에서 채집한 대부장경호, 향토사료관에서 관찰한 단각고배류·개배·유대파수부·대부장경호·회색연질계 등은 7세기 이전에 상당하는 것으로, 울릉도에서 신라토기의 사용을 6세기 중엽으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확인된 토기류들은 단각고배 출현 이후에서 인화문토기 발생 이전의 단계 및 초기 인화문토기 단계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자에 따라 절대연대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각 단계의 연대를 어떻게 결정해야할 것이냐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큰 폭의 차이는 없는 편이다.
우선 고배의 단각화 과정에 대해서는 고신라토기의 변천 과정에서 그 연대를 도출할 수 있는데, 6세기 중엽 경에는 유개(有蓋) 고배(高杯)의 대각(臺脚)에 투창(透窓)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단각화(短脚化)된 고배가 나타난다. 단각고배와 반구장경호(盤口長頸壺)의 조합이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는 역사적 계기인 대가야의 멸망 시기를 잡아서 6세기 후반이라는 절대 연대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결과물의 진출이기 때문에 경주와 그 주변에서 단각화의 과정을 관찰하여 보완되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의 토기 양상은 이른바 ‘황룡사 창건기’라는 컨텍스트에서 관찰된 토기군에서 살펴야한다. 앞서 예를 든 울릉도 채집 토기류들은 바로 황룡사지의 1차 가람 기초, 늪 혼립지, 폐토기 무지 등에서 출토된 창건기 토기들에서 살필 수 있는 형식들이며 고분군들로 말한다면 경주 방내리 고분군, 양산 북정리 고분군, 창령 계성 고분군 등에서 이 단계의 유구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 창건기 토기의 연대에 관해서는 이미 역사 기록이 참고될 수 있으므로, 보고자의 견해에 따라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서 6세기 후반의 이른 단계까지 설정할 수 있다.
최근 조사에서 확인된 인화문토기 중에는 초기 형식들이 몇 점 확인되었다. 현포리 유물산포지에서 출토된 것과 향토사료관에서 발견한 소형장경호 등은 선각으로 된 삼각집선문과 반원 컴파스문과 인화문이 공존하는 단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치구(多齒具)에 의한 이른바 종장연속문(從長連續文)계의 인화문이 출현하기 이전에 낱개로 원권문(圓卷文)이나 반원권문을 찍은 인화문토기도 볼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초기 형식의 인화문이 언제 출현하여 얼마나 지속되었느냐 하는 것은 연구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다. 다만 이 시기의 고분군들이 신라의 영역에서 많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변천의 기술(記述)과 연대 추정에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선각문과 인화문의 공존과 종장연속문계의 출현 이전에 해당하는 초기 인화문토기의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정도로 넓게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울릉도의 토기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대부분 경주계 토기로 해당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성이 상실되고 다른 정치체로 흡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종 구성과 기형 문양 등에서 지역성과 전통성이 없다는 것은 부장 토기 구성만이 아니라 토기 생산 체제 나아가서는 그들이 생활해 왔던 생활 방식이 경주의 그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말한다. 즉 이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생산 체제를 유지할 수 없고, 경주의 문화와 경제에 종속된 상태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과거의 조사보고서에서는 고분 축조 시기의 토기를 회청색 신라토기와 적갈색 승문토기로 대별하여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주로 천부리 고분군 출토 토기를 근거로 하여 울릉도의 고분 축조 시기와 아울러 토기의 연대도 7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론한 바 있다. 그 동안의 신라토기에 대한 조사와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되어 왔고, 최근 조사에서 새로운 자료가 확보된 것도 있어서 기존의 울릉도 토기 자료에 대한 연대관이나 그 해석에 약간의 수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선 과거의 보고서에서 울릉도의 토기군을 제작 기술의 전통에 따라 2군으로 대별한 것은 전적으로 타날문토기[이른바 승문토기]는 고식(古式)일 것이라는 단순한 선입견 때문이며, 울릉도 출토 토기는 물론 신라토기에 대한 적절한 이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양자 모두 고신라 혹은 통일신라의 토기로 포괄하여야 하며, 그 안에서 태토의 성질이나 기타 제작 기술상의 특징으로 세분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과거에는 김해식 토기하면 타날문토기가 연상되었고, 타날문은 고식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각종 타날문은 거의 통일신라시대까지도 계속되었으며, 자기가 아닌 토기에도 타날문이 있었기 때문에 타날문에 대해 특필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출토된 토기는 적색 토기와 회청색 토기로 대별함이 타당할 것 같으며, 적색 토기의 범주 안에 타날문토기를 포함시키고, 회청색토기 안에 고신라 회청색토기와 인화문토기 등을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아울러 울릉도 신라토기의 연대와 시기 폭에 있어서도 재고를 필요로 한다. 최근 영남대학교 조사에서 남서리 및 현포리 유적에서 채집한 토기와 향토사료관에서 관찰한 토기 중에는 6세기 중엽 경까지 연대를 올려 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신라와 본격적인 교섭의 시작이 역사 기록 그대로 6세기 전반 경부터이며, 통일신라시대 전 기간 동안 고분 문화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