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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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裕全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미연 |
출생 시기/일시 | 1835년 - 박유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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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60년경 - 박유전 상경 |
몰년 시기/일시 | 1906년 - 박유전 사망 |
출생지 | 박유전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 |
거주|이주지 | 박유전 이주지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강산 마을 |
학교|수학지 | 박유전 수학지 - 전라북도 순창군 |
활동지 | 박유전 활동지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강산 마을 |
기념비 | 박유전 선생 기념비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보성 공원 |
기념비 | 예적비/노래비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대야리 강산 마을 |
성격 | 판소리 명창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강산제 창시 |
[정의]
개항기 순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박유전(朴裕全)[1835~1906]은 김세종(金世宗)·장재백(張在伯) 등과 같이 순창에서 배출한 빼놓을 수 없는 명창이다. 박유전은 후에 전라남도 보성의 강산 마을에 오래 살면서 이른바 ‘보성 소리’를 구축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가 구축한 서편제는 동편제 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판소리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박유전이 판소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그리고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 세계를 오늘날까지 전승하게 한 점도 그의 업적이다. 박유전의 외모에 대해서는 명 고수였던 김명환에 의하여 소개되어 있다. 김명환은 박 명창에 대해 한쪽 눈이 곪아 빠졌기 때문에 일목(一目) 명창이라고 불렸으며, 해학과 소리에 대한 탄탄한 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고 한다. 박유전은 소리꾼이면서도 신체적 부족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다.
[활동 사항]
박유전은 1835년(헌종 1)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곳에는 박유전의 생가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박유전의 소리 길 입문에 대한 일화는 그의 판소리에 대한 치열한 노력을 보게 해 준다. 아버지가 박유전의 형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한쪽 눈을 보지 못하였던 박유전은 신체적 콤플렉스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으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오기가 발동한 박유전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는 어깨너머로 배운 소리를 치열하게 연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 앞에서 소리 시험을 보는데, 형의 솜씨가 엉망인 것을 보고 형이 못하는 대목을 자신도 모르게 멋지게 불러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을 계기로 정식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박유전은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명성을 얻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명창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중앙에서 박유전은 판소리를 유난히 좋아하였던 흥선 대원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 벼슬을 얻게 되었으며, 대원군에게 선글라스처럼 검은 안경인 오수경과 나귀, 그리고 추위를 막기 위하여 팔뚝에 끼는 금 토시까지 하사받았다. 박유전의 목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고와서 사람들이 ‘안구성’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성품이 단정하고 성실하였기 때문에 대원군의 사랑방에 드나들던 유생들이 그를 좋아하였으며 판소리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시기에 박유전은 유생들과 나눈 의견을 토대로 동편 소리와 서편 소리의 맛을 가미한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창시하였는데, 이 소리가 바로 강산제이다.
강산제 「심청가」의 전승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존하는 「심청가」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전승 구조란 점에서 박유전의 음악사적 위치는 보다 넓어지고 높아질 수 있다. 박유전→정창업→김창환→김봉학→정광수,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한애순·김록주, 박유전→정응민→정권진·성우향·성창순·안채봉으로 전수되었다. 대원군의 그늘에서 총애를 받던 박유전은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지방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고, 그의 소리는 이날치·정재근·김채만·공창식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새 타령」은 후기 8명창으로 꼽히는 이날치를 거쳐 근대 5명창으로 추앙받았던 이동백에게 전해졌다.
후기 8명창 가운데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박유전은 당초 동편제 지역인 순창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전라남도로 자리를 옮겨 서편제의 시조가 되었다. 그를 서편제의 시조라고 일컫는 것은 평, 우조[평온하고 남성적인 가락] 위주의 동편제 소리와는 다른 계면조[슬픈 가락] 위주의 서편제 소리가 박유전에 이르러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고, 그의 소리 양식이 서편제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순창 출신의 박유전은 순창의 동편제를 거느리고 보성의 서편제 고장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그 결과 동편제와 서편제를 접목시킨 새로운 강산제를 분파시켰다. 그래서 이러한 판소리 업적을 통하여 박유전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울렀던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박유전의 한양 생활 이후에 다듬어진 「춘향가」를 강산제라고 부른다. 이 강산제의 성립은 서편제가 성립하고 한참 후인 19세기 말이라고 추정된다. 강산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로는 다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 번째가 대원군이 박유전의 판소리를 듣고 ‘네가 제일강산이다’라고 한 것이며, 두 번째는 말년에 보성 강산리에 은거하면서 그때부터 강산제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강산제는 주로 계면조의 아름답고도 슬프면서 정교하고 감칠맛 나는 서편제의 전형을 이루는데, 이는 판소리사에서 박유전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박유전에 의하여 성립된 강산제의 음악적 특징은 한스럽고 처절한 것으로, 대체로 정교하고 감칠맛이 나며 높은 기교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강산제 선율의 특징으로 세련된 기교를 들 수 있는데, 흔히 ‘갈 데까지 간다’라는 표현처럼 온갖 기교를 부려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엇붙임이나 잉어걸이 등 장단의 변화와 장식음의 구사는 강산제만의 중요한 특성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보성 소리의 우두머리로 박유전을 꼽는다. 박유전은 애초에 자신의 본바탕을 서편제 소리로 채운 후에 한양에서 활동하면서 서편제와는 취향이 대조되는 다른 유파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강산제이다,
[상훈과 추모]
박유전에 대한 흥선 대원군의 지극한 애정은 『조선 창극사(朝鮮唱劇史)』에 잘 나타나 있다. 박유전은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소리로 판에 설 때 「새 타령」이 가장 특색이 있는 소리였다고 칭찬을 들었다. 흥선 대원군의 총애는 더욱 깊어져 무과 급제를 시켰다. 박유전은 「적벽가」에도 특기가 있었으며, 「춘향가」 중 이별가는 출중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박유전의 창법은 이날치에게 많이 전해졌으며, 또한 「새 타령」의 법제를 후대에 계속 전승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박유전은 대원군의 사랑을 받았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판소리를 전개하였으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 나간 명창이었다.
특히 박유전의 판소리사 업적은 그의 소리가 정재근을 거쳐 정재근의 조카인 정응민에 이르러 현대 판소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보성 소리로 거듭나게 하는 데 기틀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틀 위에 박유전의 판소리 업적은 19세기 판소리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이 그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유전은 흥선 대원군의 부침과 운명을 함께하였고 대원군의 죽음과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비관하여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나 무덤조차 알 길 없다. 순창에는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문만 있으며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 공원에는 그의 기념비가, 그가 살았던 강산 마을에는 예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척박하였던 조선 후기 신분 체제 속에서 천민이고 광대였으며, 거기에 신체적 한계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며 최고의 명창까지 올라섰던 박유전은 생애나 예술 세계에서 자신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