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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23
한자 -大母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산55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형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대모산성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산55 지도보기

[도실군의 치소성, 대모산성]

대모산성(大母山城)[홀어머니 산성]은 1975년 2월 5일에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산 55번지에 위치한다. 해발 150m 내외의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내에 연못과 우물이 있고 경천(鏡川)이 산성을 에워싸고 있다. 대모산성은 군창(軍倉)의 용도로 사용되었기에 군사 방어적 산성 기능도 하였을 것이며, 동시에 행정 치소(治所)의 읍성(邑城) 기능을 하였던 성곽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순창군은 백제 시대에 도실군(道實郡)이었으나 통일 신라기에 순화군(淳化郡)으로 바뀌었고, 고려 시대에 순창군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 도실군의 고지(古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 토성으로 알려진 익산 토성(益山土城)과 매우 흡사하다. 익산 토성도 백제 시대 초기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포곡식 산성이고, 산성 안에 넓은 터가 위치하는데 대모산성도 마찬가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순창현 조에 대모산성에는 군창이 있었다고 기술해 놓았는데, 군창은 관아에서 관리하는 군수품의 창고였다. 이처럼 도실군 시절에는 대모산성에 관아 건물이 들어설 만큼 넓은 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 시대의 치소성(治所城)들은 평지에 조성된 평지성이 아니라 포곡식 산성 또는 평산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익산 토성도 그러하지만, 정읍시 고부면에서 발굴된 정읍 고사부리성(井邑古沙夫里城)[사적 제494호]도 마찬가지이다. 정읍 고사부리성은 백제 시대의 중방성(中方城)이었다. 백제 시대 치소성은 방어적 기능과 효율적 기능을 고려하여 산성 형태의 읍치성(邑治城)을 조성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대모산성은 성벽 축조 방식이 가로 방향의 눕혀 쌓기와 세로 방향의 눕혀 쌓기가 혼용되고 있다.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 성곽 축조의 전통을 고려 시대까지 유지하였고, 고려 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모산성이 백제 시대의 치소성이었으리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발굴 결과 백제 시대의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기와는 궁성, 관아, 사찰 건축물에 사용되었던 것이지 일반 민가에 사용되지 않았기에 대모산성도실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행정의 치소였고, 관곡을 쌓아 두었던 군창이 있었던 곳이다.

1454년(단종 2)에 펴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151 순창군 조에서 “대모산성. 둘레가 290보이며, 안에 작은 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이 있다[大母山城 周圍 二白九十步 內有小泉 冬夏不渴 有軍倉]”라고 하였으며, 1481년(성종 12)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순창 성곽 조에는 “대모산성. 군의 서쪽 4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는 780자, 높이는 26자, 그 안에 샘이 하나 못이 하나, 그리고 군창이 있다[大母山城 在郡西四里 石築周七百十尺 高二十六尺 內有池泉各一 有軍倉]”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대모산성은 석성(石城)이었고 길이는 215.15m[710척], 높이는 10.61m[26척]였다. 또한 대모산성에는 군창이 있었고,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성곽 안에 있다고 하였다. 백제 시대 기와 유물의 출토와 포곡식 산성의 형태가 익산 토성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도실군의 치소성이 분명해 보인다.

[대모산성은 누가 쌓은 것일까]

조선 후기의 대모산성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70년(영조 46)에 엮은 『문헌비고(文獻備考)』 권2 성곽 조에 “대모산성은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이며 주의는 780척이고 안에는 샘과 못이 각각 하나씩 있다. 원나라 초에 한 할미가 아홉 아들을 데리고 성을 쌓고 여기에 살았다. 많은 곡식을 모아 관곡을 삼았는데 지금은 폐해졌다[大母山城 在郡西四里 石築 周七百八十尺 內有池泉各一 元初有老駒率箕九子 築城居此 儲穀物 仍爲官穀 今廢]”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지 않는 아홉 아들을 거느린 늙은 할미라는 축성의 주체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문헌비고』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원나라 초는 1234년(고종 21)경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는 시점이다.

원나라 초는 대모산성의 축성 주체를 고려 시대와 연관 짓겠다는 시대적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할미가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이 성곽을 축조하고 그곳에 살았다는 데서 대모산성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노구(老駒)’는 ‘노구(老嫗)’의 오기로 보인다. 이러한 오기는 당시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문헌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였을 것이다. 아홉 명의 자식을 거느린 노구는 고려 시대 당시 순창읍 일대에서 문벌지족(門閥之族)이 향촌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며, 순창의 경제력을 자손이 번창한 가문에서 장악하였음을 시사한다. 아홉 명의 아들을 둔 노구는 문벌지족의 상징적 여성이고, 축성하였다는 점은 순창군의 행정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것은 당시 문벌지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도 지방 호족을 성주(城主)라 불렀다. 지방 호족들은 성곽을 쌓고 경제력과 정치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호족은 촌주(村主) 세력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지방 세력을 말하는데, 순창에서도 순창읍에서 문벌지족으로 성장한 지방 세력이 대모산성을 개축하고 곡물을 많이 모아서 국곡(國穀)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 통치권의 권력이 비록 중앙 집권제라 할지라도 작은 지방 단위까지 미치지 못하여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향촌 자치권을 갖고 있었는데, 순창이 그러한 사례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 순화군이었던 순창군이 고려 시대에 들어와 순창현(淳昌縣)으로 강등되고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에 이속시켰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노구는 마고할미 계통의 여산신(女山神)을 가리킨다. 노구는 훌륭한 문벌지족의 어머니가 신격화된 명칭이다. 노구는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홀어머니라는 뜻인데, 가문에서 훌륭한 어머니를 신격화하여 노구로 신화화한 것이다. 따라서 노구는 대모(大母)와 동격의 위대한 여성을 지칭한다. 대모는 위대한 어머니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대모, 즉 위대한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 잘 기르고 훌륭한 아들로 키우는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예로 들면, 순창의 문벌지족 가운데 옥천 설씨(玉川薛氏)가 있다. 설씨 집안의 조씨 부인이 아들을 여덟 명을 낳아서 길렀는데, 여덟 명 가운데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씨 부인은 존경받는 인물로 신격화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조씨 부인은 사유이생(四乳而生)의 능력으로 아들들을 기른 여성으로 묘사되었으며, 국가에서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존호를 내릴 정도였다. 자손을 번창시킨 가문의 어머니는 대모, 즉 위대한 어머니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또한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귀미리]에 남원 양씨(南原楊氏) 집성촌이 있다. 남원 양씨의 시조모라 할 수 있는 이씨 부인이 고려 말에 귀미리에 터를 잡고 자손을 번성시킨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래서 이씨 부인이 판 것으로 알려진 마을 샘물을 대모 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하듯이 대모산성순창읍에 거주하면서 향촌 자치권을 장악한 문벌지족과 관련이 있는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문의 대모들이 신격화되면서 마고할미와 결합하여 노구라는 신격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으로 노고(老姑)와 노구의 지명을 가진 산의 명칭들은 무수히 많다. 대모가 신격화되면서 마고할미 신화와 결합하여 여산신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노구산과 노고산의 산신은 여성이고, 이 노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아들 아홉 명을 거느리고 치소성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노구가 아홉 명을 거느리게 되어 홀어미가 되고, 대모산성홀어미산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아홉 명의 아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중국의 산신 가운데 벽하원군(碧霞元君)이 있다. 벽하원군과 그 자녀 여덟 명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그 여덟 명은 아들이 아니고 딸들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구낭사(九娘祠)라는 사당이 있다. 구낭사는 아홉 명의 여신을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벽하원군이 여덟 명의 딸들을 거느리는 당신도가 그려져 있다.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수성당(水城堂)[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8호]에는 개양 할미가 여덟 명의 딸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의 산신 신앙이 전래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덟 명의 딸이 아들로 바뀌어 여덟 명의 아들을 낳거나 아홉 명의 아들로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는 장자 상속 제도와 남아 선호 의식에 따라 득남 기원 풍토와 가문의 계세 의식이 강렬하던 때라서, 대모산성 설화에서도 홀어머니가 아홉 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순창군은 ‘신설양(申薛楊)’의 명향(名鄕)으로 이름나 있다. 신설양은 고령 신씨(高靈申氏), 옥천 설씨, 남원 양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창에서는 대표적인 문벌지족이었다.

[대모산성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가문 이야기]

1992년에 발견된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淳昌城隍大神事跡懸板)[중요 민속 문화재 제238호]에 산성 대모(山城大母)가 등장한다. 산성의 여신이 대모라는 것이다. 대모는 가문을 빛낸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가문에서 신격화한 어머니상이기도 하다. 다른 지역에서도 거구의 힘센 여성이 축성하는 성곽 설화가 등장하는데, 순창 대모산성에서도 힘센 과부가 성 돌을 들어서 성을 쌓는 축성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그 성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서 젊은 과부가 된 양씨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옆집에 설씨 총각이 살고 있었다. 설씨 총각은 양씨 부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양씨 부인은 거절하였다. 설씨 총각의 끈질긴 구혼에 못 이긴 양씨 부인은 내기를 하기로 하였다. 양씨 부인이 성을 쌓고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다녀오는 내기를 걸었다. 설씨 총각이 한양에 다녀오는 동안에 양씨 부인이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양씨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올려놓기 전에 설씨 총각이 먼저 도착하였다. 양씨 부인은 약속한 대로 혼인을 허락해야 하는데,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살아온 터라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양씨 부인은 수절을 버릴 수 없어서 치마를 뒤집어 쓴 채 대모산성 아래 경천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대모산성홀어미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모산성의 성곽 설화에는 조선 후기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17~18세기 민간 문학과 민속 전승의 구전 문화가 발달하면서 민간 계층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모산성의 축성 설화에도 서너 가지의 전승 이야기와 순창의 문화적 실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첫째, 설씨 총각과 양씨 부인이 등장한다. 설씨는 옥천 설씨를 가리키고, 양씨는 남원 양씨를 가리킨다. 옥천 설씨는 남성이고 남원 양씨는 여성이다. 옥천 설씨와 남원 양씨는 순창의 문벌지족과 지방 세력을 상징하는 성씨이기도 하지만, 신격화된 가문의 인물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전통의 순창 성황신(城隍神)에서 성황 대왕(城隍大王)이 설공검(薛公儉)[1224~1302]이고, 성황 대부인(城隍大夫人)이 양씨 부인이었다. 이러한 성황 신앙의 전통이 대모산성의 성곽 설화에 반영된 것이다. 과부란 홀어머니인데, 남원 양씨이씨 부인은 고려 후기에 유복자를 안고 개성에서 홀로 낙향한 여인이었다.

둘째, 대모산성 축성 설화에 거인 설화가 스미어 있다. 거인 설화는 「마고할미 설화」이다. 과부가 치마폭에 성 돌을 날라 운반하여 성을 쌓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수만 개의 성 돌을 들어 옮겨다가 성을 쌓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아무리 힘센 과부일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구전하는 거인 설화는 거구의 마고할미가 산을 옮기거나 성을 쌓거나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거나 거석을 운반하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대모산성의 축성 설화에서도 양씨 부인과 마고할미가 결합하여 힘센 과부로 등장하여 성 돌을 쌓는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셋째, 대모산성 축성 설화에는 「오누이 힘내기」 설화가 스미어 있다. 「오누이 힘내기」 설화에는 홀어머니와 힘이 장사인 아들과 딸이 등장한다. 오빠와 누이가 한 집에 살 수 없으니 목 베기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죽기로 하였다. 오빠는 쇠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고 누나가 치마폭으로 성 돌을 날라 쌓는 성 쌓기 내기를 한다. 누이가 이길 것 같자 홀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딸이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순창 대모산성 설화에서도 「오누이 힘내기」 설화가 결합하면서 설씨 총각과 양씨 부인이 내기를 벌인다. 내기는 목 베기가 아니라 청혼과 허혼이다. 양씨 부인이 성곽 쌓기를 완성하기 전에 한양에 갔던 설씨 총각이 돌아와 허혼할 상황이 되자, 양씨 부인은 성 돌을 나르던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경천으로 떨어져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산성 대모와 순창의 여성황신]

대모산성의 노구는 고려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 초는 원나라 초기로서 1230년(고종 17)대가 그 시점이다. 고려 말에 순창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이 향촌 지배권을 행사하는 역사가 대모산성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순창에서는 고려 말부터 단오절에 성황제(城隍祭)가 연행되면서 성황 신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순창의 성황신은 고려 말 실존 인물인 설공검이다. 설공검설신(薛愼)의 아들인데, 설신옥천 조씨(玉川趙氏)의 아들이다. 옥천 조씨는 팔자삼자등과(八子三子登科)를 이뤄 낸 훌륭한 어머니로 추앙되어 국대부인에 봉해졌다. 그렇다면 노구가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대모산성을 쌓은 주체는 설씨 가문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설씨 총각은 옥천 설씨 가문의 상징이며, 그 총각은 설공검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14년(고종 1)에 설자승(薛子升)순창군 구림면 율북리로 들어와 정착한 이후 순창의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문벌지족으로 성장하여 향촌 자치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순창의 성황신을 설공검으로 배향하는 데 주도적이었으며, 성황당에 성황 대왕과 성황 대부인을 배향하면서 남원 양씨이씨 부인을 끌어들여 여성황신으로 배향한 것이다. 이씨 부인남원 양씨 가문의 대모로서 신격화하여 대모산성의 여산신으로 안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순창에서는 단오절 성황제를 지낼 때에 대모산성에서 여성황신을 모셔 와 옥천동 성황당에 설공검과 배위를 시켰던 것이다. 순창읍 성황당에는 건곤 신상(乾坤神像)이 있는데, 성황 대왕 설공검과 성황 대부인 양씨 부인이 배향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대모산성 축성의 의미]

대모산성의 역사는 순창의 역사를 말해 준다. 대모산성은 백제 시대 도실군의 치소성이었다. 도실군은 순창군의 백제 시대 지명이다. 백제 시대 순창군의 관아와 지방 세력의 중심이 대모산성이었다. 대모산성의 명칭은 고려 말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통일 신라 시기까지 대모산성은 순창군의 치소성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향읍(鄕邑)의 규모가 커지자 현재의 순창군청 부근에 읍성을 두고 치소성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대모산성은 과거 순창군의 정신적 중심이 깃든 곳으로 남아 있었고, 대모산의 산신인 여신을 산성 대모로 숭배해 온 것이다. 이 대모는 곧 순창군의 문벌지족의 대모로 신앙되었고, 순창의 여성황신으로 설정되었다. 그 후 대모산성의 신격화는 「오누이 힘내기」 설화가 가미되고, 성곽의 주체였던 문벌지족의 가문까지 엮어져 성곽 설화로 전해 오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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