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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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고려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시흥 역사.
[개설]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는 고려시대 인주(仁州)와 안산현(安山縣)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대표적 지방 지배 세력으로는 인주 이씨 가문과 안산 김씨 가문을 들 수 있다. 개경과 가까웠던 이들 지역의 지역민은 대몽항쟁기에는 몽골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침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시흥시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문화유산으로는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과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가 있다.
[행정구역의 변천]
시흥시 의 북쪽 지역은 고려시대의 인주에 속했고 남쪽 지역은 안산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주는 신라 경덕왕이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을 소성현(邵城縣)으로 고쳐서 율진군의 관할하에 두었는데, 고려에 들어와서도 명칭의 변경 없이 그대로 소성현으로 불리었다. 소성현은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부]의 속현(屬縣)이었다가 숙종 때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다.인종 때에는 모후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인주로 개칭되어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되었다. 또 1390년(공양왕 2)에는 공양왕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
안산현은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안산군(安山郡)으로 고쳤으며 1018년에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시]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308년(충렬왕 34) 문종의 탄생지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어 안산군(安山郡)이 되었다.
[지방 통치 조직의 구조]
고려의 지방제도는 태조와 성종을 거쳐 현종대에 그 기본 골격을 마련하였다. 고려시대의 지방제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주현(主縣)․속현(屬縣)체제를 들 수 있다. 고려의 군현제(郡縣制)는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를 위해 일정 크기의 군현을 구획하여 왕이 임명한 외관(外官)을 파견하여 지배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520여 개의 군현 가운데 외관이 파견되었던 주현이 130개에 불과하여, 주현과 속현의 숫자가 대략 1:3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인주와 안산 모두 고려의 지방제도의 기본 틀이 마련되는 현종대에 속현으로 편성되고 있어 모두 지방관인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고 인근 수주(樹州)와 수주(水州)의 지방관으로부터 행정적인 예속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주는 숙종과 인종대에 왕의 외향(外鄕)이라는 이유로 읍호의 승격이 이루어졌으며 인종대에 지주사가 파견됨으로 인해 주현이 되어 1개의 군과 1개의 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1390년에는 주에서 부로 승격되어 경원부가 되었다. 안산현은 현종 대 수주의 속현이었다가 어느 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감무가 파견되었다. 이후 충렬왕대 문종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지군사가 파견되어 안산군이라는 주현이 되었다. 이러한 읍호의 승강은 주로 토지나 호구의 증감에 따라 발생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왕의 외향이나 귀족의 내․외향인 경우에도 정치적인 고려 하에 읍호의 승강이 이루어졌다.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은 속현들의 향리를 지휘하여 조세 수취와 치안 유지와 같은 지방지배업무를 처리하였다. 하지만 속현도 독자적인 통치영역을 갖고 향리들이 읍사(邑司)를 구성하여 자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향리층은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호정(戶正)․병정(兵正)․창정(倉正)․사(史) 등이 있어서 부세 징수와 군사, 형옥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최상위인 호장은 중앙정부로부터 직첩(職牒)을 받아 임명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산현 지역에는 김(金)․안(安)․임(林)․방(方) 등의 성씨가, 인주 지역에는 이(李)․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박(朴) 등의 성씨가 각각의 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향리를 배출하면서 지역지배층으로 존재하였다.
향리와 함께 지방통치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던 세력은 사심관(事審官)이었다. 성종대에는 사심관의 정원이 정해지는데 500정 이상의 주는 4명, 300정 이상의 주는 3명, 그 이하는 2명을 두록 하였다. 당시 전국의 군현 총수를 고려한다면 성종대의 중앙관료 대부분이 사심관에 임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주와 안산현의 규모를 300정 이상으로 추정하였을 때 각 지역의 사심관은 3명 또는 4명으로 이 지역 출신의 중앙관료 3명~4명도 사심관으로 존재하며 각 지역과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지방통치의 일부분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지방 지배 세력의 동향]
지금의 시흥시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려시대 지방 지배 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인주와 안산현에 근거를 두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던 인주 이씨 가문과 안산 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주를 본관으로 하는 인주 이씨와 안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산 김씨는 혼인을 통해 서로 인척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통혼권으로 연결되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귀족 가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초에 소성현을 근거지로 한 인주 이씨는 병마사 대광 기평이 소성수로 나아가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가문을 세웠다고 하는데, 실질적인 시조로 알려진 이허겸은 안산 김씨 김은부의 장인이기도 하다. 김은부의 세 딸은 현종 의 비로 원성왕후 , 원혜왕후 , 원평왕후 가 되었고, 따라서 이허겸의 딸이자 김은부의 처는 현종 의 장모이자 덕종 , 정종 , 문종 의 외조모가 되는 것이다. 이후 인주 이씨 가문은 왕비를 여러 명 배출한 고려 왕실의 외척가문으로서 그리고 재추(宰樞) 이상의 고위 관직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실 공히 고려시대 최고의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안산 김씨의 시조 김긍필(金肯弼) 은 인접한 인주의 지방세력이던 이허겸 과 사돈관계를 맺을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 김은부 는 중앙 관료로 진출하여 공주 절도사가 되었는데, 거란족의 침입으로 현종 이 나주까지 파천할 때 공주에 들른 현종 을 환대하였다. 후에 딸 3명이 차례로 왕후의 자리에 올라 덕종 , 정종 , 문종 을 낳아 안산 김씨도 고려 후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지칭하는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포함되는 문벌귀족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외적의 침략과 대응]
1231년 몽골족의 침입을 받은 고려 정부는 약 30년 동안 치열한 항전을 벌였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몽골군에 대항하여 장기간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농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방어하게 하는 입보(入保) 정책을 실시하여 기병전술에 익숙한 몽골군에 대응하여 여러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안산지역에서는 1256년(고종 43)에 대부도의 별초(別抄)가 야간에 인주의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나가서 몽골군 100여 명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이들 별초군에는 대부도 주민들뿐만 아니라 정부의 해도(海島) 입보정책에 따라 인주 ․ 남양 ․ 안산 등지에서 입보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고려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인 1271년(원종 12) 2월 7일(신축) 착량(窄梁)을 지키던 몽골군이 대부도에 들어와 주민들을 침탈하자, 주민들이 몽골군 6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전달인 1월에 개경에서 숭겸(崇謙) 등의 관노비들이 몽골 관리를 죽이고 진도의 삼별초로 가려는 모의가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대부도 주민들이 개경의 관노비들과 행동을 함께 하려고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주부사 안열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되고 말았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가 경기도 서해안까지 침탈해 왔다. 1223년(고종 10)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이래 가장 극성을 부린 시기는 우왕대였다. 1378년(우왕 4) 2월 왜적이 안산․ 인주․ 부평․ 금주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4월에도 왜적이 안산군을 침략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인 남양․ 평택․ 강화도․ 김포 등지에도 여러 차례 침입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인주와 안산군 일대에 더 많은 왜구의 침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유산]
시흥시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문화유산으로는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과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가 있다. 보물 제1324호인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시흥시 대야동 소래산 중턱에 있는 병풍바위[장군바위]에 선으로 새겨져 있다. 머리에는 연화(蓮花) 무늬와 당초(唐草) 무늬로 장식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자연스럽고 원만한 얼굴, 연꽃 무늬가 새겨진 받침대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둥근 형상에 눈, 코, 입을 부리부리할 정도로 큼직하게 나타내고 있어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적 제413호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중국식 가마 축조 방식인 벽돌 가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제조 기술의 수용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특히 한 지역에 청자와 백자가 동시에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청자와 백자의 발생 시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과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는 고려시대 시흥 지역을 영향력 아래에 두었던 호족 등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고려시대 시흥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