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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411
한자 廣州大團地天幕村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방인아

[정의]

1960년대 후반 서울시의 인구문제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에 조성되었던 대규모 천막집.

[개설]

1960년대에 들어 서울은 전입인구가 늘어나면서 급격한 인구증가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기존 도시기반시설은 늘어나는 수요를 따르지 못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였으며, 가장 큰 문제는 주택 부족이었다. 서울시의 국공유지에는 무허가건물이 마구 들어서게 되었고, 이는 심각한 도시문제로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무허가건물을 일소하고 서울시 주변에 거주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신도시를 개발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 아래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할구역 10㎢(300만평)를 선정하여 철거민 50만명을 수용, 정착시킬 대주택단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 사업의 공식명칭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이었다.

[내용]

1969년 5월 2일부터 철거민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실제로 이 시기는 택지조성을 위한 정지작업이 불과 2개월밖에 진행되지 않은 때였다. 정지작업이 이루어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었으므로, 제대로 된 주택조성은 고사하고, 있던 길마저 뒤범벅된 상황에서 48세대 154명의 철거민 입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트럭에 실려 온 철거민들은 우선 수진리(현 중앙시장 건너편) 야산 중턱에 가수용지(假收容地)라 부르는 천막을 치고 그 속에 수용되었으며, 그들은 택지가 조성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천막의 크기에 따라 한 천막 속에 2가구에서 4가구씩 배정되어 생활하였으며,며장롱이나 찬장 등의 가구로 칸막이를 하고, 가족단위의 수용생활을 하였다. 즉, 천막 20개 정도의 가수용지일 경우 세대수는 70~80이 되고 인구는 300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가수용지는 지금의 수정구 신흥동, 수진동, 태평동중원구 중앙동 등지에 조성되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현재 신흥2동의 산비탈지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철거민들의 생계가 막막해졌고, 먹을 것이 부족해져 기아상태에 이르는 등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특히, 겨울이 되면서 어려움이 더해, 이듬해인 1970년 봄에는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가수용지는 1971년 8월 10일에 일어난 입주민들의 대규모 소요사태로 인하여 철거민 입주가 중단된 뒤에도 1년 넘게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03 행정지명 현행화 중동에서 중앙동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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