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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도시 강경의 성쇠와 상업 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728
한자 近代都市江景-盛衰-商業活動
영어의미역 The Rise and Fall and Commercial Activity of Ganggyeong Modern City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은지

[개설]

강경금강논산천이 합류하는 가항(可航) 포구로서 전라북도 용안면의 평야 지대, 논산평야 등 국내 굴지의 미곡 생산지를 배후에 끼고 있어 조선 후기 이래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876년 개항 이래 충청도 전체의 시장권이 철도와 개항장을 거점으로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전통적 시장권의 중심인 강경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그러나 유통시장권에서의 지위 하락에도 제국주의적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강경에서의 상품 거래량과 거래 규모는 이전에 비해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강경도 근대 도시로 급성장 하였다.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의 확립]

개항 이후 국내 분업의 발달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대외 무역의 확대로 상품 유통 경제도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품 유통 경제의 성장은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던 농민적 상품 화폐 경제가 활성화된 결과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가 새로 창출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는 조선의 시장을 제국주의 국가의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창출되었다. 이러한 유통 구조는 1882년 한성 개시와 내지 통상권의 허용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이를 개척한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청나라 상인들이었다.

청·일 상인은 영국제 섬유 제품을 중심으로 한 중개 무역을 전개했는데, 이들의 무역은 국내의 물가 표준이 정해지지 않은 단계를 이용한 기만적인 약탈 무역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들은 중개 무역에서 나아가 시전 상인의 전매 상품인 백목면·명태 등 국내 물품까지 취급하였으며, 기선과 같은 근대적 수송 수단을 매개로 조선의 연안 유통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내륙 시장권까지 침투하여 국내 선상들의 취급 품목인 북어·다시마 등의 상권에 침투해 선상과 행상, 시전 상인 등 조선 상인의 상권을 침탈하면서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내 상인보다는 취급 상품이 유사한 청·일 상인 사이에서 훨씬 경쟁이 치열하였다. 1885년에서 1894년까지의 무역 추이를 보면 절대액에서는 일본과의 교역양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청나라 상인은 주로 수출 무역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 상인은 자본재 상품의 수출과 더불어 미곡 수입에 집중하였기에, 조선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는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고 일본과는 흑자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일본에게 있어 조선의 시장이 상품 시장뿐만 아니라 자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원료 공급지로서 역할이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는 1880년 원산항, 1883년 인천과 부산항, 1897년 목포항과 1899년 군산항 개항을 계기로 나타난 개항장 중심의 유통권 형성으로 구조화되었다. 개항장 중심의 유통권도 제국주의적 유통 구조의 확대에 따라 변동하였다. 1890년대를 기점으로 곡물 수출의 중심지가 종전의 부산항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는 인천이 서울과 인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이 작용한 것으로,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가 전통적인 서울 중심의 시장권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국내에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조선 상인들도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의 특권 상인이었던 어물전이나 백목전 등의 시전 상인은 외국 상인이 서울에 직접 점포를 설치하여 시전 상인의 상권을 침해하자, 외국 상인의 점포 철수를 요구하는 동맹 철시를 시도하였다. 또한 선박을 통해 전국의 해상 유통권을 장악하여 조선 후기 강력한 상인으로 성장하였던 경강 상인도 서울을 중심으로 상권을 유지했지만, 일본 기선의 세곡 운송으로 타격을 입었다. 다만 개성 상인과 평양 상인들은 종래의 상업 조직을 이용해 활동 영역을 수출입 유통업으로 확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서울 이북 지방에서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지방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포구 주인이나 여각, 객주층들은 외국 상인들이 근대적 기선을 이용하여 포구 시장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점차 이들 상인에 종속되면서, 제국주의적 상품 화폐 경제에 기생하는 층으로 전락해갔다.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권의 핵심인 개항장에는 개항장 객주가 성장하였다. 객주는 원래 상품 유통을 중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봉건 권력과 결탁하여 독점과 특권을 누렸던 상인인데, 개항장 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이들은 상회, 상의소 등의 객주 조합을 결성하여 정부에 상업세를 부담하는 대가로 특권 상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말부터 외국 상인의 내지 행상이 활발해지면서 개항장 객주의 상권도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객주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항에 개항장의 상품 유통을 독점하는 25객주 전관제를 실시하였지만, 외국 공사의 항의와 소상인들의 반발로 25객주 전관제는 곧 철폐되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 구조의 창출 과정에서 시전 상인이나 경강 상인 등 전통적 대상인의 상권은 점차 위축되었고, 포구 시장권을 장악한 객주, 여각층들은 이들 외국 상인의 하부에 기생하는 상인층으로 전락하였다. 다만 내륙 장시 시장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개성 상인들은 외국 상인과 경쟁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상권을 유지하거나 성장할 수 있었다.

[충청 시장권에서 강경의 위치]

옛 은진군 김포면에 속했던 강경논산천의 합류점 동쪽에 위치한다. 과거에는 신포 또는 김포라고 불렸다. 금강논산천이 합류하는 가항포구로서 전라북도 용안의 평야, 논산의 평야 등 국내 굴지의 미곡 생산지를 배후에 끼고 있어 조선 후기 이래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충청남도의 시장권은 둔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 예산 및 서해안 지역, 강경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 연안 지역으로 대별되었다.

강경 시장권은 은진군·석성군·노성군·연산군·부여군·임천군·홍산군·공주군·정산군, 그리고 전라북도의 여산군·용안군·익산군·함열군·고산군·금산군·진산군을 포괄하였다. 1895년의 보고서에는 전라도 여산, 충청도의 은진·노성·부여·석성의 각 군으로부터 산출되는 미곡·잡곡·우피, 기타 잡품 등이 모두 강경을 경유하고, 외국 수입품 및 한국 해산물 같은 것도 강경을 거쳐 각 지방으로 수송되었다고 나와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강경금강 수운을 기초로 하여 주변 지역에서 산출되는 생산물의 집하·배급 기능을 하는 광역의 유통 중심지였던 것이다.

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집산 화물에는 외부로 반출되는 상품으로 미곡,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품으로 소금이 있었다. 강경시장은 상품의 종류가 다양하여 전라도의 목면·마포, 서울로부터의 중국 견직물, 전주로부터의 종이·세공물·서양직물 등도 집산되었다. 이러한 상품 구성은 강경과 예산·공주·둔포를 연결하는 시장권과 원격지 시장과의 교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직물류 등의 수입품이나 어염을 미곡 중심의 내륙 농산물과 교역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충청남도 지역 시장권의 핵심적 결절점은 강경포였던 것이다.

일본의 육군참모본부에서 편찬한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충청도편은 개항 이후 1888년 사이의 정보를 수록한 보고서이다. 이 책에 의하면 오늘날의 논산 지역에는 은진에 읍내장·저교장·강경장·논산장이 있었고, 연산에는 사교장·두마장, 석성에는 읍내장과 창리장이 있었으며, 노성에는 장시가 없었다고 한다. 상장과 하장으로 구분되는 강경장 중 강경 상장은 음력 4일, 강경 하장은 음력 9일에 장이 섰다. 장이 서는 날 모이는 사람은 4,000명에서 7,000명 정도였지만 추석이나 설을 전후한 시기에는 1만 5,000여 명이나 몰렸고, 모든 물화가 모여들어 대구·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충청도의 중심 시장으로서의 강경의 지위는 1899년 군산 개항, 1905년 경부철도 개통 전까지는 변함이 없었다.

[군산 개항 이후 강경장의 변화]

전국적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서 강경의 지위는 1899년 군산의 개항, 1905년 경부선, 1912년 군산선, 1914년 호남선 개통을 계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군산 개항을 계기로 금강 하류 지역이 대부분 군산에 잠식당하고, 경부철도의 개통으로 대전이 중요한 유통거점으로 성장함으로써 강경의 시장권은 위축되었다. 군산선·호남선의 개통 이전에는 논산평야에서 산출되는 미곡의 대부분이 강경을 경유하여 군산에 집결되었고, 강경에서 다른 상품과 교환되어 배급되었다. 그러나 이리와 군산을 잇는 군산선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호남평야에서 산출되는 미곡 대부분은 강경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군산으로 반출되었다.

이에 따라 강경은 지역 시장권의 중심적 지위를 군산에 넘겨줘야 했다. 강경은 군산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상업 중심지로 하락한 것이다. 강경의 지위는 개항장인 전라북도 군산에 종속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충청남도 내에서도 하락하였다. 1909년의 상황을 전하는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강경장은 예전에 전국에서 유명한 장시였으나, 집산고는 논산장에도 미치지 못하며 대전보다 낮기 때문에 충청남도에서 3위를 차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강경이 유통시장 내에서 지위가 하락한 것은 개항장과 경부철도 개통으로 강경에 몰려들었던 상품의 집산 구역이 축소된 결과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충청도 전체의 시장권이 철도와 개항장을 거점으로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시장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 시장권의 중심이었던 강경의 지위가 하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통시장권에서의 지위 하락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적 상품 화폐 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강경의 상품 거래량과 거래 규모는 이전에 비해 증가하였다. 1910년의 강경 사정을 전하는 기록을 보면 “강경의 상업 규모는 군산 다음으로 번성하였다. 그곳 시장권의 일부는 군산에 편입되었지만, 군산 개항과 동시에 강경은 더욱 발전하였기 때문에 강경과 군산은 순치관계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군산 개항 이후 오히려 강경의 변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경과 군산 간에는 정기적으로 기선이 왕래하였고, 이에 따라 강경항을 거점으로 하는 여객과 화물 운송이 매우 활발해졌던 것이다. 인구도 매년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청인 등 외국인의 거주가 늘어났다. 이 시기 강경 지역의 인구 변동을 살펴보면 일본인의 진출이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1907년과 1909년 사이에 호구는 300호 남짓 증가했지만, 인구는 200명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1909년 인구 통계에서 ‘일가’라고 불리는 일용 노동자층이 대거 강경에 몰려들어 집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즉, 가족을 구성하지 않은 1인 1가구의 일용 노동자층이 대폭 증가한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강경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군산항 개항 이전인 1898년경이었다. 미오루 등 7명의 일본인들이 강경에 땅을 매입하고 점포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개항장 주변에 일본인 조계를 설정하여 그곳에서만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 조영 등의 거주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한 조일수호조규 제4관과 제5관을 위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일본 공사에게 일본인들의 철수를 요청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이 요청을 거부하였다.

초기 강경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모두 철수하였다가, 이듬해인 1895년 인천에 소재한 소노상점이 강경에 지점을 설치하고 무역업을 개시하면서 다시 강경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강경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군산 개항 이후부터였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부터 일본인의 강경 진출은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자 일본인들끼리 강경일본인회를 조직하고 학교도 설립하였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일본인의 진출이 증가하면서 강경의 도시화도 급물살을 탔다. 1909년경 강경의 시가지를 설명한 자료에는 “인가가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고 시가의 구획은 불규칙하지만, 최근 일본 거주자가 증가하면서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경의 도시화로 인해 강경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금강을 따라 올라오는 선박 중 중소형 선박은 강경에 정박했지만, 대형 선박은 대부분 황산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전라북도에 속한 황산도 강경과 합해져 하나의 지역을 형성하였다.

[강경장의 상품 유통과 논산장의 성장]

군산 개항 이후 강경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주로 식료품과 일용잡화, 피복류와 그 재료였고, 그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콩류와 잡곡·면포·금건·방적사·연초·주류·어류·식염·석유·도기·철물 등이었다. 1909년경 강경장의 거래액은 윗장인 강경 상장은 하루 7,000원, 1개월 2만 1000원이었고, 1년 25만 2000원이었다. 반명 아랫장인 강경 하장의 하루 거래량은 8,700원, 1개월 2만 6130원, 1년 31만 3,590여 원으로, 아랫장과 윗장을 통산하면 1년에 총 56만 5,590여 원이었다. 이와 같은 거래고는 당시 논산장의 1년 거래액의 절반 정도 규모였다. 군산 개항, 군산선, 호남선의 개통으로 강경의 유통량은 크게 위축되었고, 반면 논산장강경장을 훨씬 능가하는 대시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강경장에서 반출되는 물품 중 중요한 것은 미곡과 잡곡이었다. 미곡은 대부분 일본 상인에 의해 취급되었고, 잡곡은 조선 상인에 의해 취급되었다. 은진·석성·노성·연산·부여·정산·공주·홍산·임천·여산·용안 등지에서 생산된 미곡은 일본 상인에 의해 수집되어 군산을 통해 일본이나 인천으로 수송되었다. 잡곡은 조선 상인에 의해 수집되어 고군산 군도나 나주 군도 및 제주도 등으로 수송되어, 섬 주민들의 주요한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강경장에 반입되는 상품 중 가격이 높은 것은 일본 상품이었고, 그 다음이 국내산, 청나라 상품은 극히 적었다. 일본에서 수입되는 상품은 금건·방적사·석유·도기·철물류·사탕·연초, 기타 소소한 잡화였다. 도기는 주로 규슈 지방에서 직접 수입되었지만, 나머지는 인천·군산에 소재한 일본 상인을 거쳐 이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청나라 상품은 목면과 비단, 소소한 잡화류가 주된 것으로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인천·군산의 중국 상인을 거쳐 반입되었다. 반입되는 국내 상품 중 주요품은 소금·어류·해조류의 순이다. 기타 육산물은 마포이며, 소금은 주로 태안 및 나주산이었고, 어류는 명태를 제외하고는 충청도나 전라도 연해 산이며, 해조류는 진도·완도·제주도산이며, 마포는 나주산이다.

이들 국내 상품 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소금이었다. 1909년 당시 소금 거래를 중개하는 객주가 30여 호가 있었으며, 이들은 부두의 한 구역 전체를 차지하였다. 객주 1호당 1년의 판매고는 2,000~3,000원을 상회하였고, 전체 소금 거래량은 2만 석 정도로 거래액은 6만 원에서 9만 원 정도로 추산되었다. 강경에 반입되는 소금은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좋은 태안염전에서 생산된 태안염이었다. 이 소금은 강경을 거쳐 충청도 전역은 물론, 전라북도 일부 지역과 군산의 간장 양조장에까지 공급되었다.

한편 개항 이후 은진군 화지산면에 있었던 논산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1909년 대한제국 농상공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논산장의 하루 평균 거래액은 1만 4,000여 원이며, 1개월에는 8만 7,300여 원, 1년에는 104만 7,100여 원에 달했다고 기록된다. 이러한 거래 규모는 충청남도에서 논산 장시가 유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논산장은 논산평야라는 큰 들을 끼고 있고, 논산천을 통한 선운이 편하기 때문에 은진군은 물론 노성·연산·석성 등에서 많은 물화가 집산되는 큰 장시였다. 논산장은 음력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으로, 장시에 모인 사람의 수가 많을 때는 1만 명, 적을 때도 5,000명 이하로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충청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시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논산장의 번성으로 인해 논산에도 외국인 거주가 늘어났다. 1909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논산장이 있는 화지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도 일본인 34호 116인, 청인 8호 25인을 헤아리고 있었다. 논산 지역의 조선인은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일본인은 농업에 종사하는 3호를 제외하고 모두 상업 인구이며, 중국인들은 모두 자국산 비단·목면·금건 및 소소한 잡화를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논산장에 반입되는 상품은 미곡·잡곡·면포·금건·마포·연초·어물·소금·소가죽·도기·철기·진유품·잡화 등이며, 이중에서 제일 많이 거래하는 물품은 쌀과 소가죽이었다.

이들 상품은 주로 군산과 인천에서 반입되었다. 1년간 반입되는 해산물량을 보면 명태가 200마리, 조기가 10만 5,000마리, 새우젓이 280항아리 정도였다. 대부분은 논산천을 거쳐 직접 작은 배로 수송되었으며, 일부는 강경 상인의 손을 거쳐 반입되었다. 이들 중에서 논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의 매매였다. 소시장은 논산장과 개시일은 같으나 개시 장소는 달라, 시가의 한 귀퉁이에서 따로 소를 거래하였다.

[근대적 금융기관의 설립]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강경에는 근대적인 금융기관들도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 직후에는 금융기관이라고 불릴 만한 시설이 전혀 없었고, 다만 두서너 곳의 대금업자가 1개월 이자 4분 내지 5분의 고율이자를 받고 대부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07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 한성공동창고회사 강경출장소, 토자권업합자회사 강경지점, 강경신탁주식회사, 강경지방금융조합 등 다양한 금융기관들이 강경에 설립되었다.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은 주로 부동산 및 동산을 담보로 하여 대출하며 이율은 100원에 하루 2전 8리, 최고 5전 3리였다. 토자권업합자회사는 회사 총 자본금이 23만 원이고, 강경지점의 자본금은 5만 원이었으며, 대출 이율은 1개월에 2부 내지 3부였다. 강경신탁주식회사는 자본금이 1만 원으로 대출 이율은 100원에 매일 6전 내지 10전이며, 1년의 운영자금, 즉 대출고는 10만 원을 상회하였다. 강경지방금융조합은 자본금이 1만 원, 대출이율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두었는데, 일본인의 경우 100원에 하루 4전 5리였고, 조선인의 경우는 5전 내지 6전이었다. 1년 총 대출액은 일본인 간에는 약 3만 원, 조선인 간에는 12만 원으로 총 15만 원에 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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