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4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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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前마을의 名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
집필자 | 장미영 |
문화유산
(1) 황산대첩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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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와 보호각
비전마을에는 사적 104호인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황산대첩비지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는데 태조의 어휘인 단(旦)자와 황산대첩에 참전한 8원수 4종사관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바위다. 그러나 1758년 발간된 운성지(雲城誌)의 ‘화수산서각’의 내용을 보면 ‘동고록정왜 경신이신(同苦錄征倭庚申李紳)’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나머지는 판독할 수 없다고 했다.
일설에는 황산대첩에 승리한 이듬해 이성계가 다시 이곳을 찾아와 창 끝으로 단(旦)자를 새겼다고 전하는데, 단(旦)은 왕위 즉위 후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고증할 수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다만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아용부곡의 교졸들이 훗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지만, 내호곡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생겨난 마을이다. 여류명창 이화중선은 내호곡의 박씨 가문에 시집을 갔다가 '소리의 길'을 찾아 집을 뛰쳐나와 결국 비전마을에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화중선의 시댁이 있는 내호곡에는 1700년대에 지은 몽심재(夢心齋)가 있다. 후손들이 이 집을 지으면서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시(詩)에서 이름을 따 몽심재라 했는데, 고려를 향한 충절을 기리는 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49호다.
(2)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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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 판소리 계보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1789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순조 때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출생한 송흥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하여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시키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중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흥록의 판소리사에서 공헌은 진양조의 완성이다. 진양조의 개발에 관해서는 그의 매부 김성옥과의 일화가 전해진다. 김성옥은 충남 강경 사람으로 당시대 명창이었으나 학슬 풍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요절하였다. 그의 소리는 그의 아들 김정근을 통해 이어져 중고제 소리가 되었다. 김성옥은 학슬풍으로 오래 누워 지내는 사이에 진양조를 개발하였는데 송흥록은 이를 오랜 기간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들에 많이 쓰인다. 또한 양반의 음악인 정악의 특성을 간직한 곳도 많다. 이러한 특성이 진양조의 개발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을 판소리화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흥록 선생으로부터 출발된 동편제는, 형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우 송광록과 손자 송만갑이 대를 이어온 이후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광범위한 애호를 받는 예술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죽고 난 후 무덤에서는 ‘내 소리를 받아가라'는 귀곡성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다. 현재 운봉의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함께 마을 입구에 그의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의 고향이기도하다. 박초월이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2000년부터는 비전마을에 국악성지가 조성되며 송흥록 선생 생가와 박초월 명창 고택이 복원되었다.
국악계의 거성으로 우뚝 솟은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김정문, 이화중선, 장재백, 박초월, 배설향, 강도근, 안숙선, 강정숙, 전인삼 등과 대금의 명인 강백천, 가야금병창의 명인 강순영, 오갑순, 강정렬 등 수많은 명창들이 지리산 자락의 아늑한 고원인 이곳에서 소리를 빚어 남원을 국악의 고장으로 키워 왔다. 남원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송흥록과 아우, 송광록, 손자 송만갑은 물론, 김정문, 강도근과 여류 명창인 이화중선, 박초월, 안숙선, 강정숙 등이 태어나 소리를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악을 바탕으로 남원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민속국악원을 비롯해 가왕 송흥록 선생 생가의 판소리 탯자리와 동편제 거리가 있으며 ‘동편제 판소리 전시관'이 개관되어 명실상부한 동편제판소리의 본향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밖에도 운봉에는 남원이나 구례 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로 명창끼리 오가면서 공부도 하고 친하게 지냈던 명창들이 대단히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소리 공부를 위해 산이나 폭포를 찾는다고 하는데 운봉은 이러한 소리공부 하기에 최적지다. 운봉은 지대가 높아 공기도 좋을 뿐더러 속세와 뚝 떨어져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치지 않고 소리에만 전념할 수 있어 산 공부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운봉이 소리의 고장임은 옛 기록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예부터 운봉은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이자 신라시대 거문고의 명인 옥보고가 옥계동에서 거문고를 키면서 말년을 보내었고 속명득과 귀금선생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운봉은 또한 비옥한 농토를 중심으로 박희옥 같은 부자가 살고 있었기에 최근까지 여러 명창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러기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도 듣고 있다.
(3) 목기와 장승의 고을
운봉하면 다투어 앞에 나서는 것이 목기와 장승이다. 장승은 운봉사람들이 흔히 벅수라고 부른다. 운봉에 가서 다짜고짜 ‘들머리에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을 물으면 사람들은 참 난감해 한다. 그런 마을이 여기저기 많기 때문이다.
우선 읍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꼽자면 서천리와 북천리가 있고 여원치에서 작은 동산을 에돌아 오르면 권포리가 있다. 인월면과 아영면에도 장승이 동문을 지키는 마을이 흔하다. 산내면의 민중 도량 실상사 장승은 너무 유명하여 이미 대접받는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운봉의 장승은 평생 흙과 더불어 늙어온 농투산이 차림으로 우스꽝스러운 엄포와 우락부락한 해학이 쪼아낸 건강한 농경문화의 표본이다. 그 험상함은 깊은 밤중에 홀로 마주 하여도 결코 무섭지 않다. 그리고도 더러 잘못이 있더라도 사정을 얘기하면 짐짓 모른 체 헛기침을 던질 듯한 관대함은 절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사뭇 다르다. 보면 볼수록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보다는 손님을 마중 나온 늙은 이장 부부의 모습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