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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생 할아버지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3010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집필자 강정만

출생과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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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생 할아버지

"특별한 태몽은 없지만 본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했던 지라 어머니가 나를 낳기 전에 매동 뒤의 서진암에서 부처님에게 자주 기도를 드리며 아들을 점지해 주기를 소망했으니, 내가 세상에 나온 뒤 어머니는 ‘너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낳은 아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내가 성장하여 스님들이 쓰시는 발우(鉢盂)의 제작을 평생의 업(業)으로 삼은 것도 어머님의 말씀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일이외다."

"내 고향 산내는 산세가 웅험(雄險)하고 곳곳의 골짜기가 구절양장(九折羊腸)이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를 마주하고 있는 백일리(白日里)는 자고로 경상도 땅 마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뱀사골의 초입이오. 역사적으로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내 고향 산내(山內)는 산 넘어 사는 사람들의 피난처였소. 내가 태어날 당시의 역사적 사건은 아는 게 없소만,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6·25 동란 시기에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도저히 잊을 수 없소."

김을생 할아버지는 1935년 11월 12일(음)생이다. 그의 본관은 광산(光山) 김씨(金氏)이다. 참고로 광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 휘(諱) 흥광(興光)이시다. 시조공께서 통일신라 말기에 나라가 어지러워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시고 경주를 떠나 광산현(光山縣) 서일동(西一洞), 현 전라남도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시어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광산김씨는 고려왕조에 정승 10여 명, 조선왕조에 문과 급제자 265명, 정승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 등을 배출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성을 얻은 씨족이다.

원래 할아버지의 집안은 광산 김씨 문숙공파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에 세거(世居)하였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혁명 때, 증조부 김변문께서 난을 피하여 할아버지 김선이를 데리고 이곳 산내 백일리로 들어오게 된 이래, 지금 4대째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게 되었으니, 대략 1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원래 산내는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외지인들이 숨어들어와 난을 피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해. 그래서 이곳 사람들의 조상은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야. "

"10촌 미만의 친족들이 보성에 일부 살고 있고, 6대조 할아버지 후손들은 곡성에 살고 있지만 사실 왕래는 거의 없는 실정이야. 산내로 이주한 이래 퍼진 직계 후손들이 나와 동생의 자손들일 뿐이야. 몇 년 전 70만원을 들여 내 할아버지를 기준으로 족보를 새로 만들었어. 내 가업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새 족보에 담은 거야."

김 할아버지는 일제 때 산내소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그 뒤 소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읍으로 나가 남원중학교를 다녔는데, 1950년 6월, 2학년 때 ‘6·25 동란’을 당하여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산내로 돌아왔다. 1953년 휴전 이후 복학을 원했지만, 당시 지리산 일대는 이른바 ‘빨갱이’들이 부락에 내려와 양식과 가축을 약탈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다시 남원읍으로 나가서 공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매일 동네에서 빈둥거리며 지내다가 한문이라도 배울 요량으로, 마을의 한학자이신 이상필 선생에게 3년 동안 사숙했는데, 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면서 옛 성현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것이 평생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문 공부와 더불어 산내 소재의 전라목기기술중학교에 입학하여 목기 제작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원래 지리산은 목기의 재료가 되는 은행나무, 오리나무, 저나무, 물푸레나무, 소태나무 등의 다양한 수종이 자라고 있는 남한 제일의 산림 지대인 덕분에, 산내는 목기를 주업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았고 옛날부터 목기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전쟁의 혼란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당시 마을 유지들은 어린 학도들에게 목기 기술을 가르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과 전통을 계승하고 산업을 일으킬 목적으로 전라목기기술중학교를 1951년에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스테인리스, 알루미늄 등 금속 성분으로 만든 생활 도구가 거의 없었고, 그릇 등의 생활 용품은 대부분 목기였으므로 목기 산업의 육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어쨌든 초대 교장으로는 당시 원광대학교 교육처장이셨던 보광(普光) 서금용(徐今龍)[병재(炳宰)] 선생이 취임하였다. 일본의 불교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던 서교장 선생님도 고향이 산내 입석이고 평소에 실상사의 스님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김 할아버지는 전라목기기술중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난 뒤, 1953년에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956년 졸업과 동시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고교 졸업 후 고향에서 의기소침하고 지내다가, 그 다음 해 1957년에 간부 후보생에 합격하고 군문(軍門)으로 들어갔으니, 김을생 할아버지의 최종 학력은 고졸인 셈이다.

학창 시절 서금용 교장 선생님, 양귀주 선생님 등의 가르침이 김을생 할아버지의 뇌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고, 한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서기태(徐基泰) 교장, 인천 경남환경 사장 박병기, 동국대를 졸업하고 문교부에서 퇴직한 친구, 진주의 배씨(이름은 생각이 안남) 등이 할아버지의 막역지우들이었다고 한다.

"6·25 동란 때 뱀사골에 은거하고 있던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가 산내 지서를 습격한 일이 생각나. 치열한 총격전 속에 군경은 달아나고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비극이었어. 당시는 주민 모두 전쟁과 기아의 공포에 떨었지만, 산내를 관통하는 만수천의 수정처럼 맑은 물에서 꺽지, 쏘가리, 무래무지 등 온갖 물고기들을 친구들과 어울려 잡던 아름다운 추억도 떠올라."

혼인

"증조부(김변문)께서 두 아들을 두셨는데 내 조부(김선이)가 큰아들이야. 조부의 동생은 딸만 둘을 두었으니 작은할아버지의 대(代)는 끊긴 셈이지. 조부께서는 선친(김원달) 한 명만을 두었고, 선친께서는 본인과 내 동생(김영근), 아들 둘을 낳았어. 나는 아들(김연수) 하나에 딸 셋을 두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 집안은 손(孫)이 귀한 편이야. 산내로 이주한 이래 자손이 많이 퍼지지 못했어."

"어머니(지옥달)는 본관이 청주 지씨(池)이고 산내면과 이웃한 경상도 땅 마천에서 대대로 살았어. 산내(전라도)와 마천(경상도)은 도는 다르지만 지리적으로 사실상 한 마을이나 다름이 없었어. 옛날에 산내는 같은 남원군인 인월, 아영보다 오히려 마천이 훨씬 가까웠고 다니기가 편했기 때문에 마천과 혼인 유통이 빈번했던 거야. 내 집사람(서순자)은 본관이 달성 서씨(徐氏)로 경상도 함양이 고향이야. 산내에 대대로 살았던 면민들은 대개 지리산권 일대의 경상도 지역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경우가 많아요. 지금처럼 무슨 지역 감정이라는 게 없었어."

군에 있을 때 아버님이 처녀 사진을 들고 찾아와 결혼을 강권했다. 1962년에 연애 한번 못하고 함양읍에서 결혼했다.

"집사람(서순자)과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36세, 큰딸은 46세, 둘째딸은 43세, 막내딸은 39세야. 다들 가정을 이루어 도시에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런데 이곳에서는 목기 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어? 젊은이들이 생계를 위해 고향을 등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더군다나 시골은 교육 여건이 너무 부실하잖아. 젊은 부부가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어도 자식들의 교육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야. 고향에는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교육 여건이 낙후되었으니,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사는 수밖에 없지."

통과의례

"젊어서는 먹고 살기 바빴으므로 무슨 통과 의례를 갖추지 못했어. 하지만 회갑 때는 회갑 잔치를 열었고, 칠순 때도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어. 우리 세대는 정말로 많이 고생했어. 하지만 우리가 고생한 덕분에 자식들의 삶은 비교적 윤택하잖아. 지금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의 무슨 기념일을 챙겨 주는 것이 더 재미있고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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