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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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麟趾 |
영어음역 | Jeong Inji |
이칭/별칭 | 백휴,학역재,문성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초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개설]
정인지(鄭麟趾)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대통력(大統曆)과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천문·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다.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였고,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컸다. 안지(安止)·최항(崔恒)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음으로써 국어·국문학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휴(伯眭), 호는 학역재(學易齋). 정익(鄭翊)의 증손자이고, 정을귀(鄭乙貴)의 손자이며, 석성 현감(縣監) 정흥인(鄭興仁)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정인지는 조선 초기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7대(代)의 임금을 섬기면서 네 차례의 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그는 1414년(태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에 올랐다.
세종의 고명으로 집현전 제학·부제학 등 벼슬을 지내면서 성삼문·신숙주·최항 등과 같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각 조, 즉 이(吏)·공(工)·예(禮)·병(兵)의 판서를 거쳐서 판중추부원사가 되었다.
세조의 즉위로 영의정이 되어 국사를 잘 처리하였다. 세조의 숭불을 반대하다 부여로 쫓겨난 일이 있었으나 바로 소환되었고, 성종의 즉위와 더불어 순성명량경제좌익공신의 호를 받았다. 학문이 해박하여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종의 천문과 역산(曆算) 진흥의 뜻을 받들어 「대소간의규표(大小簡儀圭表)」 및 흠경보루(欽敬報漏)를 제작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치평요람(治平要覽)』·『역대병요(歷代兵要)』·『고려사』·『학역재집(學易齋集)』 등이 있다.
[묘소]
정인지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다. 묘역에는 봉분 2기와 비석 1기가 있으며, 충청북도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지고,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수양대군의 참모로 활동하여 우의정에 오르고, 공신의 호와 하동부원군의 봉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