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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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 |
영어음역 | Samguk sidae |
영어의미역 | Three Kingdoms Period |
이칭/별칭 | 열국시대(列國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노석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의 1세기 중반에서 서기 7세기 중반까지의 역사.
[개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는 삼국이 형성되면서부터 백제(660), 고구려(668)가 멸망할 때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들 나라 외에도 가야와 부여 등의 나라와 함께 소규모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중반까지 남원 지역에는 섬진강 유역의 마한과 남강 유역의 변한이 있었다. 섬진강 유역은 마한을 이어 백제가 진출하였으며, 남강 유역은 변한을 계승한 가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한편 남원시 산내면 달궁리의 달궁 계곡에 마한의 별궁이 소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 궁터로 알려진 유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전설에 불과하지만 재고해 볼 만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남원을 남대방군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중국에서 남원에 대방군을 설치했을 가능성은 없다.
백제에서는 이곳에 고룡군(古龍郡)[지금의 남원 시내]을 두어 통치하였으며, 신라에서는 지금의 운봉 지역에 모산현(母山縣)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남원 시내를 중심으로 한 백제와 운봉을 중심으로 한 신라는 서기 7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백제에서 신라의 경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지만 남원에서 운봉을 통과하여 합천을 거쳐 가는 길이 가장 편한 길이었다. 이 길은 이후 견훤이 경주로 진출하면서 활용하였다.
602년(무왕 3)에 백제는 신라의 아막성(지금의 운봉)을 공격하였으나 진평왕이 귀산 등을 파견하여 막아내게 하였다. 이로써 백제에서 운봉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642년(의자왕 2) 7월에 미후(彌猴) 등 40여 개 성을 함락하였고,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현재의 남원 지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이후 신라와 당의 연합 공격을 받아 660년에 멸망하였다. 이로써 남원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