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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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燦文 |
영어음역 | Jeong Chanmun |
이칭/별칭 | 정 안토니오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경희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
[가계]
본관은 진양(晋陽). 1822년 10월 13일 아버지 정서곤과 어머니 울산 김씨(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토니오이다.
[생애]
1822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닌 인물로 전해진다. 정찬문은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윤씨와 혼인한 뒤, 1863년 42세 때 부인의 권유로 입교해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 재위 기간과 고종 즉위 직후에 걸쳐 있는데, 이 때는 천주교 박해의 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그래서 비교적 박해에 위협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정찬문은 진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정찬문은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굳건한 신앙을 고백했다. 이 때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날라 주었던 부인 윤씨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정찬문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나이 45세에 남강 백사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었다. 사촌들은 참수되어 머리 없이 몸체만 있는 정찬문의 유해를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냈다. 그래서 인근 지역에서는 머리가 없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로 전해져 내려왔다. 한편 정찬문의 순교 이후 부인 윤씨는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됐고, 결국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허유고개를 떠났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47년 당시 문산본당 주임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가 광산 김씨라는 사람의 증언을 듣고 무두묘를 확인해 기념비를 세웠다. 정찬문은 124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