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 하공진(河拱辰) : 성종(成宗) 때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되었다. 임금의 병이 매우 심하니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芳)과 중랑장 탁사정(卓思政)과 더불어 항상 근전문(近殿門)에서 지키다가 이어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옮겼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 글안)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니 하공진이 따라가 길에서 배알...
-
경상남도 진주의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지방통치구역. 강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3년(663) 2월에 빼앗겨 신라 영토가 되었다. 이후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뽑아내어 청주(菁州)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는 다시 전국의 지방조직을 9주, 5경으로 정비하고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경상도 지방에서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서부 경상남도에서 거창, 산청, 진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4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평면 타원형의 주거지의 분포 상황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야의 영역이었던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 후기에 이르러 영역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방 통지조직 중 삼국통일...
-
언어를 표현매체로 한 예술 및 작품. 진주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진주 문학의 연원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욱면랑(郁面娘)의 성불 등천」이 있다. 이것은 진주를 배경으로 한 불교설화인데 수행과 정진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의 장엄한 종교 문학이 되기도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기록에서 진주를 문향(文鄕) 혹은 명시(名詩)의 고향이...
-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정립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 삼국시대는 신라의 건국(서기전 57년), 고구려의 건국(서기전 37년), 백제의 건국(서기전 18년)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멸망(660년), 고구려의 멸망(668년)까지의 약 700여년을 말한다. 이 시기 진주는 처음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어 거열성(居列城)이라 불렸다. 백제는 475년(개로왕 21) 9월에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
-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전해오는 민요. 임동권이 쓴 『한국민요집』IV에 채록되어 있으며, 1996년에 박이정이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한 『시집살이 노래연구』에도 약간 다른 가사로 정리되어 있다. 「진주난봉가」는 「진주낭군가」라고도 불린다. 진주난봉가는 ‘① 남편에게 외면당함, ② 남편의 외도를 목격함, ③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워함’이라는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울도 담도 없...
-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북문.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 김수와 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
-
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
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진주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이다. 그런데 하연(河演)[문효공(文孝公)]이 1451년(문종 1) 처음으로 족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 ‘세계가 전함이 없고 『고려사(高麗史)』에 홀로 하시랑 공진이 있어 듣기에 기쁘나 동원(同源)이면서 분파가 확실치 않다.’고 한 것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