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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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茶丘 |
영어음역 | Hong Dagu |
이칭/별칭 | 홍준기,찰구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병인 |
[정의]
[가계]
본관은 남양. 본명은 홍준기(洪俊奇)이며 홍다구(洪茶丘)는 아명(兒名)이다. 몽고명은 찰구이(察球爾)로, 원나라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는 1218년(고종 5) 몽골에 투항한 홍대순(洪大純)이며, 아버지는 몽골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한 홍복원(洪福源)이다.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가 그를 다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생애]
1261년(원종 2) 아버지 홍복원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에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일본 정벌을 위한 군량과 조선의 조달을 감독하였다. 곧이어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로서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로 돌아갔다.
1277년(충렬왕 3) 진국상장군 정동도원수(鎭國上將軍 征東都元帥)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에 대비하였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에서 다시 일본 정벌을 추진하자 동정군(東征軍)의 지휘를 자청하였다. 1280년에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벌이 또 실패로 끝나자 원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 다시 고려에 오지 못하였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이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해에 내안의 잔여 세력인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략하자 다시 기용되어 요양행성의 관리가 되었고, 이듬해 1291년에 죽었다.
[활동사항]
1263년(원종 4)에 영녕공(永寧公) 왕염(王剡)을 참소해 당시 그가 원에서 가지고 있던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을 빼앗았다. 1269년(원종 10) 원종이 임연(林衍)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 이듬해 3,000명의 귀부군(歸附軍)을 이끌고 고려에 왔다. 이때부터 봉주(鳳州)의 둔전총관부(屯田總管府)에 주둔하면서 부원 세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을 지휘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원나라의 상도(上都)에서 지로와만(只魯瓦輓)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丞相) 백안(伯顔)을 쫓아 상도를 공략해 전공을 세웠다. 그 해에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해 김방경(金方慶) 무고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로 다시 왔다. 김방경을 고문하고 고의로 사건을 확대시키고자 했지만, 충렬왕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으로 원나라로 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