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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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方慶 |
영어음역 | Kim Banggyeong |
이칭/별칭 | 본연(本然),충렬(忠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병인 |
[정의]
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정치가.
[개설]
김방경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서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김방경은 첫 부인으로 박익정(朴益旌)의 딸을 맞이하였다. 기거랑지제고중서사인을 지낸 박익정은 무인 집권기에 고급 관인을 배출하여 세족으로 성장한 죽산박씨(竹山朴氏)의 후예였고, 인천이씨 이장용(李藏用)과는 사돈관계였다. 박씨는 3남 3녀를 두고 김방경에 앞서 사망하였다. 박익정의 장남 박휘(朴暉)가 이장용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의 처남(박휘)의 장인이 이장용이었다.
김방경은 재취로 손씨를 맞아 1녀를 두었으나 손씨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 서북면에 있을 때 김방경은 관기(官妓)와의 사이에서도 1녀를 두었다.
김방경의 큰아들 김선(金瑄)은 황조정대부사재경 설인검(薛仁儉)의 딸과 결혼하여 전법판서 상장군에 올랐다. 둘째 아들 김흔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여 판밀직사사찬성사상락공에 이르렀지만 그의 혼인관계는 알 수 없다. 셋째 아들 김순(金恂)[1258~1321]은 문과에 합격하고 도첨의중찬 허공(許珙)의 딸과 결혼하여 중대광상락군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에 이르렀다. 김순의 장인 허홍은 최씨정권 말기부터 출세길에 올랐던 인물이었고, 공암허씨는 고려 후기 권문에 속하였다.
김방경의 첫째 사위인 조저변은 참지정사 조계순(趙季恂)의 아들인데, 황주조씨 조계순은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이 집안은 무인 집권기에 세족으로서 기반을 갖추었다. 막내 사위인 평강 채홍철(蔡洪哲)은 뒤에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찬성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김방경의 큰 손자 김승용(金承用)[김선의 둘째 아들]은 문과에 합격하여 첨의찬성사 원관(元瓘)의 딸과 결혼하였고, 밀직사 만호에 올랐다. 원관은 충렬왕대 중찬(中贊)에 오른 원부(元傅)의 아들로, 원주원씨는 원부 이래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가문이다. 둘째 손자 김승택(金承澤)[선의 셋째 아들]은 삼중대광 도첨의사 정승에 올랐다. 또 큰 손녀는 찬성사 조련(趙璉)과 혼인하였는데, 조련은 평양조씨 조인규(趙仁規)의 아들이었다. 김방경의 증손자 김후(金厚)[김승용의 큰아들]는 검교첨의평리 만호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김방경은 죽산박씨를 처가로 두었고, 그의 자손들은 공암허씨, 황주조씨, 원주원씨, 평양조씨, 청주정씨, 감포백씨 등 당대의 세력가문 및 원의 고위층과 혼인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혼인관계가 김방경과 그 후 안동김씨의 정치활동과 세력형성의 기반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생애]
김방경은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이 양육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고 전한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으로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의 인정을 받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장군에 올랐다가 반주(班主) 전략(田略)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형부상서·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1270년 개경 환도에 반대하는 삼별초의 반란이 시작되었는데, 1273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에서 그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공로로 마침내 시중에까지 올랐다.
1274년(충렬왕 즉위) 10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는 데 도독사로서 고려군 8,000명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고,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백령도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무죄를 인정받아 방면되었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았다. 1281년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활동사항]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김방경은 토벌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라는 책임을 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에게 환대를 받았다.
[상훈과 추모]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죽송동 능촌에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