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리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 남동리(진도읍)는 진도읍성 남문이 있던 곳으로 남문거리 또는 남문동이라고 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1400년 경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 후 밀양박씨와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부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남상리, 남하리, 남산리 일부를 병합...
-
호남지역에서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무당인 단골이 독자적으로 소유·관장하는 종교적 영역. 전라남도 진도의 단골판은 여러 단골이 마을별과 씨족별로 모든 단골댁들을 나누어 소유하면서 굿, 맥이, 비손, 명다리, 택일 등의 모든 종교적 의식과 인생상담을 관장하는 독점적인 영역이다. 단골은 자기의 단골댁에서 씻김, 성주굿, 혼사굿 등은 ‘마령’이라 하는 굿대금을 받고, 간단한 환자가 생기거...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속하는 행정리. 진도읍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상리(北上里)라 하였다. 조선 초기 경주박씨 35대손 박근무(朴根茂)[1405~1467]가 입향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북상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동리에 병합되었다. 처음에는 박씨 집성촌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김해김씨·전주이씨 등 다른 성씨가 진도군청을 중심으로 들어와 살면...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 속하는 법정리. 진도읍성의 안쪽이 되므로 성안 또는 성내라 하였다. 본래 진도군 부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상리·동중리·동하리·서상리·서하리를 병합하여 성내리라 하였다. 오늘날의 성내리는 동하리와 동중리에 해당한다. 철마산(鐵馬山)[304m] 수리봉[389m], 남산(南山)[243m]으로 둘러싸인 산릉의 완경사면에 입지...
-
성내리의 가장 중요한 생산 기반 시설은 상가이다. 상가는 성서리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진도읍 내의 상권은 역사적으로 보면, 성서리에서 남동리와 쌍정리 등으로 확장되었다. 철마광장의 남쪽 경계선에서 남동리의 중심부로 도로가 관통되기 이전만 해도 성서리가 진도읍 상권의 주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도읍 상권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버스터미널의 위치와 이동...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 속하는 행정리. 조선시대 진도군의 관아가 있던 성안을 법적으로 성내리라 하며, 성안을 동·서로 나누어 그 동쪽을 성동리(城東里)라 하였다. 1792년경 청주한씨의 입향 후 김해김씨·밀양박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진도읍성 안의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성동리는 1980년대까지 진도읍의 중심지였으나 남동리가 신흥시가지로 개발되면서 활기를 많이 잃었다. 옛날...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속하는 행정리. 성내리를 이분하여 성동리(城東里)와 성서리(城西里)라 하였을 때, 성내리 서쪽에 있다 하여 성서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성안의 관아 땅으로만 활용하였다고 전해지는데, 1792년경에 전라남도 진도읍성 안의 서쪽으로 청주한씨가 입거한 이후 차츰 밀양박씨 등 다른 성씨가 입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북쪽에 철마산[304m]이 자리잡...
-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본에 따라 동작과 대사를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 형태인 연극과 스크린 상에 움직이는 영상(映像)을 이르는 영화를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말. 연극은 삶의 근원적·총체적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다른 어떤 문화적 산물에 못지않게 역사적·지역적·민족적 소산인데 반하여,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
-
거주인의 산업별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성내리에는 비농가가 많고, 이곳이 진도읍의 중심이어서 농경지 면적은 적은 편이다. 전체 경작지는 188㏊인데, 논은 60㏊이고, 밭은 128㏊, 임야는 10㏊이다. 2005년의 진도읍사무소 통계에 의하면, 성동리 거주자가 경작지하는 면적은 112㏊로 59.6%이고, 성서리의 경작지 면적은 76㏊로 40.4%이다....
-
성내리와 남동리 및 쌍정리의 경계도로는 한동안 진도읍에서 가장 넓은 중심도로였다. 그러나 철마광장에서 남동리로 큰 도로가 연장 관통되고, 남동리 일대에 외곽 도로가 개설되면서 중심도로의 기능은 많이 감소되었다. 성내리 주택가 지역은 옛 길이 남아 있고 노후된 가옥들이 있어 차량 통행을 저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
1968년에 실시한 마을조사에 의하면, 성내리의 취업자 산업활동 인구는 총 666명이었다. 남자는 351명이었고, 여자는 315명이었다. 농업,임업,수렵업 종사자가 354명이었는데, 남자보다 여자가 월등하게 많았다(남자 124명, 여자 230명). 제조업 종사자는 총 19명이었는데, 남자는 13명, 여자는 6명으로 농업 관련업과는 반대였다. 전기,가스,수도,위생 시설 서비스업 종사...
-
성내리의 생산 과정 가운데 상업은 광주나 목포 등의 대도시에서 상품을 도매 또는 중매로 들여와 소매하는 형태이다. 농업은 고령인 소유의 농경지는 임대로 경작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경지 면적이 적어 자가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성동리의 경우 전체 농경지 가운데 27.7%가 휴경지일 정도로 농업 의존도가 낮은 편이다....
-
성내리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인 남동리, 쌍정리 등에 다양한 업종의 상가들이 개업해 있고, 진도군에서 가장 큰 진도읍 매일시장이 인접해 있어서 생산한 상품들은 이곳을 통해 판매 및 유통하고 있다. 농업 생산물의 판매 유통은 다른 농촌마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성동리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품은 쌀, 구기자, 배추, 대파 등인데, 자급용이 많다....
-
성내리(城內里)는 현재 행정구역상 진도군 진도읍에 속한 마을이다. 성내리는 성안 또는 줄여 성내라고도 하는데, 성동(城東)마을과 성서(城西)마을을 행정리로 두고 있다. 성내리의 마을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기왕의 동상리(東上里), 동중리(東中里), 동하리(東下里), 서상리(西上里), 서하리(西下里)를 합쳐 성내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구한국지방...
-
군강(郡岡)[산] 성안에 있는 산으로 공원이 되었는데, 성이 있다. 성내(城內)[마을] 성내리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성내리(城內里)[마을] 성안, 성내라고도 부르며 진도읍성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성안 또는 성내리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마을 이름이 처음으로 명명되었다. 진도군청, 진도등기소, 농협중앙회, 진도교육청 등 행...
-
비록 성내리에 향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인접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았다. 성내리는 진도군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인 국민학교가 처음 개교한 곳이다. 이 국민학교는 진도읍의 다른 국민학교에 비해 약 10년 이상 빨리 개교했으며, 현재에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군의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해 성내리는 근대적 교육을 가장 빨리...
-
성내리는 진도읍의 중심 마을이다. 오늘날과 같이 진도읍이 확장되기 이전에는 성내리에 대다수의 공공기관들이 위치해 있었고, 진도군을 대표하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도군에서 발생했던 상당수의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성내리를 장소적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철마광장이 진도읍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
◦ 임삼현(任三鉉)[1874~1948]: 오위장을 지낸 임경록(任慶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호석(湖石)이며, 1889년 16세가 되던 해에 소치(小癡) 허련(許練)의 제자로 입문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운림산방의 살림을 운영했고, 소치 허련이 1893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의 휘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다 소치의 유언을 따라 운림산방을 관리했다. 미산...
-
성내리는 1792년경 청주 한씨가 입향한 후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입거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한때 성동리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성씨는 한씨였다. 한편 성서리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인구의 변화가 많아 다성적 특성을 보여준다....
-
성내리는 성동리와 성서리로 구분된다. 이장도 각 마을별로 있으며, 두 개의 독립된 공동체가 결합되어 있다. 성내리, 특히 성서리는 가구 및 인구 이동이 빈번하고, 변화가 많아 정확한 통계가 어렵다. 따라서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그 추세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성내리의 가구수는 1968년 조사 당시 285가구였으나, 126가구가 증가하여 2006년 현재...
-
성내리의 인접마을인 교동리 275번지에 향교가 있으며, 역시 인접마을인 남동리에 진도천주교회와 통일교회가 있다. 한편 성내리에는 진도교회(감리교)와 진도중앙교회가 있다. 그리고 인접마을인 쌍정리에는 원불교 진도교당이 있다. 성동리는 약 30가구가 장로교계 기독교인이고, 3가구 정도가 감리교계 기독인이다. 불교는 10여 가구인데, 진도읍에 소재한 영룡사를 많이...
-
진도읍은 진도군의 중심지이고 성내리는 진도읍의 핵심지이다. 본래 진도읍은 1437년(세종 19)에 부내면이 되었다가 1873년(고종 11)에 진도면으로 개칭되었고,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행정개편이 있었지만 성내리는 읍성의 안쪽에 있다 하여 처음부터 성안 또는 성내로 불렸다. 법정동은 성내리이지만 행정동은 진도초등학교가 있는 성동리와...
-
성내리의 특징은 교육 관련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비록 오늘날에는 성내리 내에 진도초등학교만 있으나, 진도군청 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성내리 64-1번지에는 진도중학교와 진도고등학교가 있었다. 따라서 이 일대는 학생들의 이동이 많았다. 게다가 성내리는 진도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원가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
(1) 진도초등학교 진도초등학교는 1909년 3월 31일 진명 4년제 4학급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4월 15일 진도읍 동외리 가마골서 개교했다. 1912년 11월 화재로 교사가 소실됨에 따라 1914년 3월에 현재의 위치인 성내리 54번지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사는 이후에도 수차례 훼손되었다. 이를테면, 1943년 11월의 화재로 교사가 소실된 바 있고,...
-
진도군청이 있던 성내리 63-1번지에는 현재 소전미술관이 있다. 소전미술관은 1977년 3월 구의회 사무실, 즉 현재의 소전미술관 바로 앞 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90년 4월 11일에는 민속유물전시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1990년 12월 10일에 진도군 문화예술관 관리사무소로 개칭되었다가 2003년 5월 31일에 소전미술관으로 재개칭하여 개관하였다. 본래 이곳은...
-
1976년 『진도군지』에 의하면, 당시 진도에 개원해 있던 의원은 진도읍에만 7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가 성내리에 위치했다. 이 의원들은 진도보건소(1965년 2월 28일 개원), 중앙의원, 자생의원, 홍인의원 등이었다. 약국의 경우에도 진도읍에 총 7개가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가 성내리에 있었다. 서울약국, 이화약국, 호남약국, 서약국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오랜 세월 동안 진도의 치소였던 진도읍성이 있던 곳이 성내리인 관계로 이곳에는 진도의 법과 행정, 그리고 공공기관들이 모여 있었다. 진도군의 발전과 더불어 진도읍이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중앙정부의 지방기관들과 각종 공공기관들이 인근 마을인 쌍정리, 남동리, 교동리 등에 신 청사를 건립하여 이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내리에는 여전히 진도군의 법과 행정을 시행하는 다수의 공공기관...
-
① 진도군청 진도군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시행하는 진도군청은 성내리 64-1번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곳으로 진도군청이 신축, 이전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전하기 전의 청사는 현 ‘소전미술관’이 있는 성내리 63-1번지에 있었다. 이곳에서 진도군의 자치 업무가 개시된 것은 1437년(세종 19)에 해진군(海珍郡)으로부터 진도군이 분리되고, 진도읍성으로 이전한...
-
① 진도경찰서 진도경찰서는 1910년 9월 16일 목포경찰서 진도주재소가 설치되면서 창립되었고, 1922년 5월 8일에 진도경찰서로 승격되었다. 경찰서 청사는 진도군 객사터였던 성내리 50번지에 있었는데, 약 30평 규모의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다. 이 청사는 1966년에 12월 17일 2층으로 된 콘크리트조 건물로 개축되었다. 그러다가 2001년 6월 22일에 지하 1층,...
-
성내리는‘진도읍성’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진도읍성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관청 이외의 건물과 시설들이 하나둘 건립되었다. 물론 진도읍성 내에 관청 및 통치 기구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관청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주택을 비롯하여 유지 및 상대적으로 신분과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이 입거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내리라는...
-
진도에는 군 단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사회단체의 수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문화 및 예술 관련 단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도군의 시민사회단체들 가운데 많은 단체들이 성내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성내리는 법과 행정 및 공공 기관들이 위치한 곳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에게도 선호되는 곳이라고...
-
진도읍성은 1987년 1월 15일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143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1440년(세종 22)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진도읍성은 성내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군면 고성리에 있었다. 고성리에 있던 진도읍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읍성이 조성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곳은 진도의 치소(治所)로서 기능을 했다...
-
오늘날에는 그 역할과 기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성내리는 진도군 경제의 중심이었다. 오늘날에도 철마광장 주변과 과거 철마광장으로 진입하던 주요 도로의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까지만 해도 철마광장에서 남강모텔이 들어서 있는 쪽이 진도시장이었다. 이곳에 있던 시장이 남동리로 이주한 것이 196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