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고려의 건국으로부터 1392년 멸망하기까지의 경상남도 하동군의 역사. 고려 시대 하동 지역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관련된 몇 건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진주목조에 진주목의 속읍 아홉 곳 가운데 하나로 하동군에 관한 간략한 연혁이 나올 뿐이다. 고려 시대에 하동군과 같은 속읍의 지방...
1770년(영조 46)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조선의 간선 도로망을 여섯 개의 대로로 구분한 바 있다. 여섯 대로의 출발점은 모두 한성이고, 종착점은 조선반도의 각 극지에 있는 주요 도회이다. 제1로는 개성과 평양을 경유한 후 의주까지 이어지는 의주로이고, 제2로는 원산과 함흥을 경유한 후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경흥로이며, 제3로는 원주와 강릉을 경유...
1651년 양곡 오두인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두류산기(頭流山記)」는 오두인(吳斗寅)[1624~1689]의 『양곡집(陽谷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오두인은 1651년(효종 2) 11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두류산기」는 이때 지은 것이다. 오두인의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해주(海州)...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서 이여송(李如松)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명장 이여송과 성두마을」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1549~1598]이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의 산세가 훌륭한 장수가 태어날 것임을 알고 성두마을 산제봉(山祭峰) 산허리를 묵필로 자르니 장수가 청룡도를 짚고 무릎을 꿇어앉은 채 죽어 갔다는 풍수담이다. 또한 산허리 붉은 선혈이 황토수로 변하고 용마가 뛰쳐나와...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하동군에 두었던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본읍(本邑)과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적 목적의 통신 수단과 시설로서 고대부터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봉수제는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나라에도 이미 삼국 시대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12세기 초기에 보인다. 1123년(인종...
1392년에서 1910년까지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역사.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아직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규모가 작은 속읍(屬邑)이 적지 않게 존재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런 고을들을 두세 개씩 통합하여 수령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동현과 남해현은 이미 수령이 파견되어 있는 고을이었지만, 1414년(태종 14) 8월 두 고을을 합쳐 하남현(河南縣)으로 개칭하였다가 이듬해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