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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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繼輝 |
영어공식명칭 | Kim Gyehwi |
이칭/별칭 | 중회(重晦),황강(黃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동부승지,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계휘(金繼輝)[1526~158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아버지는 지례현감(知禮縣監) 김호(金鎬)이고, 어머니는 이광원(李光元)의 딸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이고, 아들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며, 딸은 진사 정기명(鄭起溟)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김계휘는 1549년(명종 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정자, 저작, 정언 등을 두루 거쳐 1555년(명종 10)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임명되었다. 1557년(명종 12) 김여부(金汝孚)와 김홍도(金弘度)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양사에서 둘의 파직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김계휘는 김홍도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함께 파면되었다. 1564년(명종 19)에 김계휘는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고 이조정랑(吏曹正郎), 집의(執義), 응교(應敎),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한 후 1566년(명종 21)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선조 재위 시기인 1571년(선조 4)에 사은사(謝恩使), 1581년(선조 14)에는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에 선발되어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 밖에 1573년(선조 6)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1575년(선조 8)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의 외직을 지냈다. 김계휘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친히 관곽을 하사하였으며, 1600년(선조 33)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다. 김계휘는 전라남도 나주의 월정사원과 충청남도 논산의 모선재(摹先齋) 등에 배향되었다.
[묘소]
김계휘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원래 묘소 앞에는 김계휘의 신도비가 있었는데, 후대에 고정리 마을 입구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김계휘는 1600년(선조 33)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에 있는 월정서원(月井書院)에는 김계휘를 비롯하여 박순, 심의겸, 정철, 홍천경 등이 배향되어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지역 유지들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모선재는 김계휘와 아버지 김호를 배향한 재실로,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