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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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村洞石造如來坐像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로 24[유촌동 497-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원종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있는 조선시대 석조 불상.
[개설]
유촌동석조여래좌상(楡村洞石造如來坐像)은 원래 옛 상무대 건너편 백석골 절터에 있던 것을 1939년 전라남도 광주군 극락면 유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유촌동] 주민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유촌리는 극락면의 면 소재지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마땅히 치성을 드릴 곳이 없어 불상과 대좌를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불상이 있던 백석골 절터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운천사마애여래좌상(雲泉寺磨崖如來坐像)이 있던 정토사(淨土寺) 또는 극락암으로 현재는 사찰의 이름을 운천사로 바꾸었다. 운천사의 사찰 내에는 불상을 옮겨 온 1939년에 극락암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토사실기(淨土寺實記)』, 『정토사소기(淨土寺小記)』, 『극락암창건기(極樂庵創建記)』 등의 기록이 193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불상을 옮긴 연대가 잘못되었거나 사찰 측의 묵인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형태]
유촌동석조여래좌상은 훼손이 심하여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불상의 높이는 185㎝이며 폭이 가장 넓은 곳이 119㎝이다. 상대석 한 개만 남아 있는 대좌는 앙련좌(仰蓮座)로 길이가 110㎝, 폭 72㎝이다.
불상은 광배와 불상의 몸 부분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주형광배(舟形光背)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훼손이 심하여 우측 일부에서만 그 문양을 찾아볼 수 있다. 불두는 나발[곱슬머리]이 아닌 소발[민머리]이고, 높이 솟은 이마에는 배호가 표시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얼굴의 형상은 둥근 모습인데 눈·코·입 등은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말아 쥔 형태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상생인(上生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를 굽히고 손바닥이 명치 아래쪽으로 오게 하였는데, 손가락 부분의 훼손이 심해 어떤 모양의 수인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오른손 수인으로 보아 왼손도 아미타여래의 구품인(九品印) 중에 하품하생(下品下生)으로 추측된다.
[특징]
유촌동석조여래좌상을 안치할 때에는 지금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이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상이 안치된 이후에 마을 주민은 물론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는데, 특히 아이를 못 낳은 사람들이 불상의 코를 깎아 먹으면 아이를 낳는다고 하여 당시 동사무소 직원들이 지키고 있음에도 깎아 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유촌동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인 비례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볼륨 있게 조각된 윗부분에 비해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차 선각화(線刻化)된 조각 기법과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전면으로 보이는 발바닥의 표현 등이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