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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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村集 |
영어공식명칭 | Jukchonjip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민 |
간행 시기/일시 | 1902년 - 『죽촌집』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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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전남대학교도서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33[용봉동 300] |
성격 | 문집 |
저자 | 고성후 |
권책 | 1책 |
행자 | 10행 24자 |
규격 | 32.7×20.8㎝[전체 크기]|20.4×14.8㎝[반곽] |
어미 |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 |
[정의]
조선 선조 때의 문신 고성후의 문집.
[저자]
고성후(高成厚)[1549~1602]의 자는 여관(汝寬), 호는 죽촌(竹村),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549년(명종 4)에 광주(光州) 유등곡(柳等谷) 압보촌(鴨保村)에서 태어났다. 1554년(명종 9)에 6세 때부터 조부 고중영(高仲英)에게 수학하고, 1583년(선조 16)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584년(선조 17) 승문원정자, 1587년(선조 20)에 전중어사, 1589년(선조 22)에 군기시판관, 1592년(선조 25)에 금마군수를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당숙 고경명(高敬命)과 고성후의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의병으로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1601년(선조 34)에 선산현감에 임명되었다. 고성후가 세상을 떠난 후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 공을 포상하는데, 고성후는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이등(宣武勳二等)에,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902년(고종 39)에 금산군 금곡사(金谷祠), 광주광역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 제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죽촌집(竹村集)』은 고성후의 후손인 고재홍(高在弘)이 1896년(고종 33)에 쓴 『죽촌연보』에 따르면, 1732년(영조 8)에 고성후의 5대손인 고천승(高天昇)이 수집·간행한 것으로 보이나, 이 초간본은 확인되지 않고 여기 석인본(石印本)은 1809년에 고성후의 6대손 고정헌(高廷憲)의 서(序)를 받았는데, 실제 간행은 1902년(고종 39)에야 이루어졌다.
[형태/서지]
『죽촌집』은 1책의 석판본이다.
[구성/내용]
『죽촌집』 1권은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는 시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에는 세계·연보·행장·제문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부록에는 교지·녹권 등 고문서가 등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