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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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元熙家屋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78[압촌동 10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안선호 |
건립 시기/일시 | 1917년 - 고원희가옥 안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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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27년 - 고원희가옥 문간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7년 6월 1일 - 고원희가옥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지정 |
현 소재지 | 고원희가옥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78[압촌동 101-1] |
원소재지 | 고원희가옥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78[압촌동 101-1] |
성격 | 가옥 |
양식 | 팔작지붕[안채]|팔작지붕[사랑채]|우진각지붕[곳간채]|팔작지붕[문간채] |
정면 칸수 | 7칸[안채]|4칸[사랑채]|3칸[사당]|5칸[곳간채]|3칸[문간채] |
측면 칸수 | 2칸[안채]|2칸[사랑채]|1.5칸[사당]|2칸[곳간채]|1.5칸[문간채]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가옥.
[개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明)[1533~1592]이 살던 곳으로, 현재의 가옥은 191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당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함께 전사한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7년 6월 1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입지 및 배치]
고원희가옥은 제봉산을 뒷산으로 하여 봉황산을 향하여 서향으로 있다. 고원희가옥이 자리한 압촌마을은 장흥고씨의 집성촌으로 고원희의 20대 선조인 고자검(高自儉)이 맨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왼쪽에 사랑채가 나오고 안쪽에는 사당이 자리한다. 사랑채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으며, 사랑채와 곳간채 사이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으며,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다. 집 앞 100m 지점에는 고경명과 그 가족 6명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광주광역시 기념물]과 장흥고씨 재실이 있다.
[위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78번지[압촌동 101-1]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고원희가옥은 고원희의 증조부인 고종석(高琮錫)이 지은 것이다. 상량문에 안채는 1917년[정사년], 문간채는 1927년[기사년]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
고원희가옥의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왼쪽부터 부엌 1.5칸, 큰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큰방 상부에는 다락을 구성하였으며, 대청에는 뒤주를 설치하는 등 수납을 위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마련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단과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정면에는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는데 부재의 규격이 넉넉하다. 가구구조는 2고주 5량 형식으로 잘 다듬은 목부재를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2고주 5량집으로 팔작지붕 위에 기와를 올렸다. 사당은 담장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건물로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고 전퇴는 개방하였다. 일반적인 사당과 달리 기둥 상부의 공포를 화려하게 조각하고 단청도 모로단청으로 꾸몄다. 사당 건물은 신위를 영원히 모시는 부조묘(不祧廟)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곳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인데 주변 건물들과 달리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가운데는 문간이고 왼쪽은 방, 오른쪽은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고원희가옥은 현재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부조묘], 문간채만 남아 있는데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고원희가옥은 조선시대 유교적 관습을 그대로 반영한 근대 한옥으로, 여러 동의 건물이 잘 남아 있어 근대기 부농 가옥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