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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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德弘 |
영어공식명칭 | Kim Deokh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바른 |
출생 시기/일시 | 15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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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추모 시기/일시 | 1785년 - 김덕홍 지평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788년 - 김덕홍 의열사 배향 |
사당|배향지 | 벽진서원(碧津書院) -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광산(光山) |
대표 관직 | 지평(持平) |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김덕홍(金德弘)[1558~15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후(金珝), 할아버지는 김극효(金克孝)이다. 아버지는 습독(習讀) 김붕변(金鵬變)이다. 동생은 김덕령(金德齡), 김덕보(金德普)이다.
김덕홍은 1558년(명종 13)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김덕홍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두 동생인 김덕령, 김덕보와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孝友)가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전주(全州)에 이르렀을 때 적세(敵勢)가 매우 성함을 보고, 김덕령에게 “이 적을 없애지 못하면 나는 살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늙으신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데 형제가 함께 죽을 수는 없으니 너는 돌아가 봉양하거라”라고 말하였다. 동생을 보내고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 합세하여 싸웠으나 금산(錦山)에서 죽었다.
1789년(정조 13)에 김덕령이 남긴 시문과 연보 등을 모아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를 편찬하였는데, 책 뒤에 김덕홍과 동생 김덕보의 유적과 유고를 붙였다.
김덕홍은 1785년(정조 9) 9월에 지평(持平)을 증직(贈職) 받았고, 이후 의열사(義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788년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형제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웠는데, ‘증병조판서충장공 김덕령·증정경부인흥양이씨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명(碑銘)과 함께 김덕홍의 비기(碑記)가 있다. 의열사는 1602년(선조 35)에 박광옥(朴光玉)[1526~1593]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는데, 1681년(숙종 7)에 김덕령이 추가 배향(配享)되고 중수(重修)하였으며,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賜額)되었다. 이후 오두인(吳斗寅)[1624~1689]과 김덕홍·김덕보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운리영당(雲裏影堂)을 신축하고 박광옥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祭享)하였다. 지금은 벽진서원(碧津書院)[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으로 개칭(改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