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혁명투사 김남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6
한자 -革命鬪士金南柱
영어공식명칭 Kim Namjoo, the last revolutionary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찬모

[정의]

1969년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으며 군부독재에 항거하였던 저항 시인.

[개설]

김남주(金南柱)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수학하였다. 대학 시절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지를 제작하여 배포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여 조직의 신문인 『민중의 소리』을 제작하였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남민전사건]으로 1979년 10월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이후 1994년 2월 사망하였으며 국립5.18민주묘지 내 민족민주열사묘역[5.18구묘지]에 안장되었다.

'금판사(金判事)'를 거부한 해남의 수재

"돌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여러 문인들은 생전에 김남주가 구성지게 즐겨부르던 유행가의 첫 소절을 그렇게 기억한다. 김남주는 9년 3개월 동안 고향에 갈 수 없는 수인(囚人)으로 철창에 갇혀 있었다. 출옥 후에 그때의 심경을 그렇게 대중적 가락에 실어 반어적으로 읊조렸던 것일까?

김남주에게 그토록 애틋했던 고향, 그곳은 한반도의 땅끝마을이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이다. 황석영이 김남주의 유고 시집 『옛 마을을 지나며』 발문에 썼듯이, 1946년 10월 16일 "글을 모르는 아버지와 일생에 한 번도 시골 마을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여느 시골 소년처럼 이른 새벽이면 논밭에 나간 부모를 대신해 소에게 풀을 먹이러 일어나야 했고, 하교하면 언제나 쇠꼴을 베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김남주의 학업 성적과 글솜씨는 매우 뛰어났으며, 삼화국민학교[지금의 삼산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김남주와 함께 '투사'가 될 이강(李綱)을 만난 것도 해남중학교에서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재수 끝에 김남주는 호남 최고의 수재들만이 다닐 수 있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종이가 빳빳하다며 담배말이로도 밑씻개로도 못 쓰겠다며 도배지로 사용하였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며 장차 '금판사(金判事)'가 되어주길 바랐다. 하다못해 면서기나 군서기라도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김남주는 2학년이 되자 자퇴를 결심하였다. 광주 미국문화원에서 훔쳐온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의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 The Revolution in Cuba)』를 원서로 읽으며, "학교 공부란 것이 나와 무관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김남주는 '인격을 갖춘 인간이 아니라 관리자나 회사원'만을 양산하는 획일화된 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박차고 나갔던 것이다.

그는 내가 커서 어서어서 커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농사꾼은 그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는

먹을 것 걱정 안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못돼도 내가 면서기쯤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중략)…

그는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상 말해왔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일러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장롱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일 거라고 부러워했다

- 「아버지」 중에서

'제사(死)공화국'을 고발하는 '불씨'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김남주의 동생 김덕종에 따르면, 대학 입학 이후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술대접하는 횟수가 늘고 주위 사람들이 자꾸 아들을 칭찬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신분이 상승된 것처럼 기분이 좋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김남주전남대학교에서 다시 만난 법대생 이강에게 "자신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학 졸업장이 부모님께는 왜 이다지도 소중한 것인지 위조 졸업장이라도 한 장 해드리고 싶다."고 탄식하곤 하였다.

1970년 5월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 발표,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서 발표 등 민중들의 항거와 변혁의 열망이 분출하고 동시에 군사독재 정부의 유화적인 술책을 지켜보며 교내 교련 반대 투쟁에 참가하는 등 이미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길로 자신의 진로를 정했던 김남주였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의 공포가 현실화되어 갈 무렵 김남주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김남주는 이강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에 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를 방문하고, 동학농민군 최초의 전승지 황토현과 동학혁명기념탑을 순례하며 반봉건 민중혁명과 민족 자주화를 위한 결의를 다졌다. 이후 우려했던 현실이 가시화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어 국회는 해산되었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김남주는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발간 계획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전봉준 유적지를 순례한 후 광주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의 지하신문과 러시아 혁명기의 지하신문에 대해 살피고 있던 터였다. 비록 규모가 작은 지하신문이기는 하나, 그 목소리는 거족적으로 울려 퍼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 신문에 '함성'이라는 제호를 붙였다.

『함성』지에서 민족사의 정통을 '갑오농민혁명, 항일의병전쟁, 북만주독립군항일투쟁, 3.1독립만세운동, 소작농민 항일투쟁, 광주학생독립운동, 원산총파업투쟁, 4.19혁명'으로 재규정하였다. 아울러 민족 자주와 평화 통일을 기본 입장으로 신채호의 민중 봉기와 외국의 철저한 혁명 운동을 강조하는 논조를 내세웠다. 김남주와 이강은 이렇듯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함성』지를 8절지 갱지에 500매 등사하여 개교 당일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1972년 12월 9일 밤에 전남대학교와 광주 시내 다섯 개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다.

이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대상으로 수사가 조여오자 김남주는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렇다고 지하신문의 발간을 그대로 멈출 수 없었다. 이강은 반유신 투쟁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함성'이라는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500매를 등사하여 서울에 있던 김남주에게 수하물로 탁송하였다. 특히 『고발』지에서 유신정권을 사형 선고를 내리는 뜻으로 넉 '사(四)' 자 대신 죽을 '사(死)' 자를 써서 '제사(第死)공화국'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를 전국에 배포하려던 김남주는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강·박석무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단체구성 위반과 형법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암울하고 엄혹했던 유신 치하, 김남주는 '밤'을 밝히는 '불씨'가 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 「돌멩이 하나」중에서

'불길'을 꿈꾸는 혁명투사

1973년 12월 김남주는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함께 수감되었다 풀려난 이강은 이내 다시 구속되었다. 1974년 4월에 발표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1974년 1월에 이강은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생이었던 이철과 나병식으로부터 전남대학교 학생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들에게 윤한봉을 소개하는 자리에 김남주와 함께했던 것이다. 김남주가 요행히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이강이 지독한 고문에도 김남주와의 관련성을 부인한 덕택이었다.

김남주는 1974년 여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잿더미」, 「그들은 누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불」, 「진혼가」 등 시 7편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이에 대해 이강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친구와 동지들이 사형과 무기 등의 중형을 선고받은 암울한 긴급조치하에서 김남주의 등단이 친구와 동지들을 위한 최선의 변론이었을 것으로 회상하였다. 검열과 출판 금지, 압수수색이 예사롭게 행해지던 당시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적 글을 발표할 수도 없었기에 김남주 자신의 취조 과정 체험과 옥중 생활을 시편으로 발표함으로써 친구와 동지들의 저항적 행동을 변호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등단 이후 김남주는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와 막심 고리키(Maxim Gorky)[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Aleksey Maksimovich Peshkov)], 그리고 민족해방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던 남미의 문학에 심취하였다. 이런 독서의 영향으로 김남주는 1975년 광주에서 『씨알의 소리』와 『창작과 비평』을 비롯한 비판적 사상 서적, 일어나 영어로 된 외국의 문학 서적을 다루는 사회과학 전문 서점 '카프카 서점'을 운영하였다. '카프카 서점'은 진보적인 청년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문학 청년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경영난으로 서점 운영을 접고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갔다.

해남으로 내려간 김남주는 『장길산』을 집필하던 황석영, 농민운동가인 정광훈·윤기현 등과 교류하며 자신의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황석영 등과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1977년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소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김남주는 러시아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쓴 존 리드(Jonh Reed)의 『세계를 뒤덮은 열흘(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등을 번역하고, 후배들과 일어판 『파리 코뮌』 등을 함께 읽었다. 그렇지만 연구소 활동도 순탄치는 않았다. 『파리 코뮌』을 강독하고 있다는 밀고가 중앙정보부에 전해지고, 김남주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자가 되었다. 이미 『세계를 뒤덮은 열흘』과 『스페인 내란』 등을 번역 중이던 원고와 습작은 압수수색을 당한 후였다. 김남주는 광주 근교에서 1개월가량 경찰과 정보당국의 동태를 살피다가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것은 '불길'을 꿈꾸며 찾아든 상경이었다.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 「잿더미」 중에서

혁명투사와 함께 남은 시편들

서울로 올라온 김남주는 서강대학교 경제학과를 중퇴한 박석률의 권유로 새로운 지하 혁명 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바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었다. 일찍이 『함성』지에 민중혁명의 역사적 정당성과 필연성을 역설한 김남주에게 남민전은 '전사'를 위한 전위조직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y)의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휴버먼(Leo Huberman)과 스위즈(Paul Sweezy)의 공저인 『쿠바 혁명의 해부(Cuba Anatomy of Revolution)』, 『레닌의 생애』 등을 읽으며 "혁명적 조직 없이는 혁명의 성공은 없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새겼던 김남주로서는 좌고우면할 필요조차 없었다. 남민전이야말로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던질 '불길'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김남주가 비합법 지하단체인 남민전 내에서 수행한 일은 두 가지였다. 조직의 신문인 『민중의 소리』을 제작하고, 조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악덕 재벌'의 재산을 탈취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이후 1979년 10월 김남주는 남민전 전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이재문과 신향식이 사형, 안재구 등 5명이 무기징역, 그리고 김남주가 15년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 뒤 신향식은 처형되었고 이재문은 옥사하였다. 후에 김남주의 아내가 된 박광숙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이후 공식적인 매체를 통해 시편을 발표하지 않았던 김남주는 복역 중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첫 시집 『진혼가』는 1984년 출판사 '청사',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는 1987년 출판사 '인동',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1988년 출판사 '도서출판 남풍'에서 각각 발행되었다. 이 시집들은 철창 안에서 뾰족하게 간 칫솔로 우유팩이나 은박지에 새긴 시편들로 동생 김덕종과 약혼녀 박광숙 등에 의해 은밀히 전해져 엮인 것이었다.

첫 시집 발간 이후 김남주에 대한 석방 요구가 이어졌다. 자유실천문인협회는 1984년 김남주 시인에 대한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는 1987년 창립식에서 김남주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또한 198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김남주 석방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1988년 국제펜클럽 미국지부와 국제펜클럽 부회장에 이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또한 김남주를 '반국가사범'이라는 지난 시대의 굴레에서 풀어 '시인'의 자리로 되돌려 줄 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1988년 12월 김남주는 투옥 9년 3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며 이듬해 남민전 동지였던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994년 2월 췌장암으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옥중 서한집과 창작 시집, 시선집, 그리고 번역 시집을 발간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반핵평화운동연합 공동의장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를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문학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시인'이기보다 '전사'이기를 자처하였던 김남주의 혁명투사로서의 삶은 출옥 후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출옥 후 채 여섯 해를 채우지 못한 채 돌연 찾아든 병마로 인해 마지막 혁명투사로 삶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민족시인 고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남주의 유해는 신군부의 서슬 퍼런 총칼에 맞서 시민군으로 저항했던 '오월 영령' 곁에 안장되었다. 자주와 평화, 통일을 위한 혁명투사로서의 김남주의 삶과 정신은 '오월 영령'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강직하면서도 서정적인 김남주의 시편은 폭압에 맞선 민중적 저항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서사시로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다.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중에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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