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을 노래한 고전문학[시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679
한자 無等山-古典文學[詩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미선

[정의]

조선시대까지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노래한 시문.

[개설]

무등산은 호남의 명산이자 전라도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고려시대부터 서석산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이러한 무등산을 노래한 시문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견된다.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의 「유제서석산규봉사(留題瑞石山圭峰寺)」, 김극기(金克己)[?~?]의 「규봉사(圭峯寺)」, 「증심사(證心寺)」, 「금석암(錦石菴)」,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의 「석실무등산(石室無等山)」 등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무등산을 노래한 문학작품은 꾸준히 이어져 활발하게 창작된다. 조선 전기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광주무등산(光州無等山)」,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등무등산광주(登無等山光州)」, 「규봉난야(圭峰蘭若)」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서석산(瑞石山)」, 배현규(裵鉉奎)[1841~1887]의 「등서석산(登瑞石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시문이 남아 있다.

[무등산을 노래한 작가와 작품]

정지반(鄭之潘)[1464~1517]의 「유서석(遊瑞石)」, 박상(朴祥)[1474~1530]의 「유서석산운(遊瑞石山韻)」, 송순(宋純)[1493~1582]의 「등무등산(登無等山)」, 임억령(林億齡)[1496~1568]의 「서석한운(瑞石閑雲)」, 이황(李滉)[1501~1560]의 「서석청운(瑞石晴雲)」,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서석청람(瑞石晴嵐)」,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증심사증조선(證心寺贈祖禪)」, 오수영(吳守盈)[1521~1606]의 「광주무등산운(光州無等山韻)」, 박순(朴淳)[1523~1589]의 「서석청람(瑞石晴嵐)」, 박광옥(朴光玉)[1526~1593]의 「서석청운(瑞石晴雲)」,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도규봉(到圭峯)」, 「규봉우우(圭峯遇雨)」, 「원효사(元曉寺)」, 김부륜(金富倫)[1531~1598]의 「등서석산(登瑞石山)」, 「유규암(遊圭庵)」, 「원효암(元曉庵)」,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도규봉사(到圭峯寺)」, 「서석청람(瑞石晴嵐)」, 이순인(李純仁)[1533~1592]의 「서석산(瑞石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의 「서석산(瑞石山)」, 조팽년(趙彭年)[1549~1612]의 「유무등산(遊無等山)」, 정운희(鄭運熙)[1566~1635]의 「유서석산(遊瑞石山)」,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유무등산(遊無等山)」, 조찬한(趙纘韓)[1572~1631]의 「유서석산(遊瑞石山)」, 고부민(高傅敏)[1577~1642]의 「서석산(瑞石山)」, 신즙(申楫)[1580~1639]의 「서석산(瑞石山)」, 정홍명(鄭弘溟)[1582~1650]의 「병서서석소감제벽(病棲瑞石小龕題壁)」, 장유(張維)[1587~1638]의 「무등산(無等山)」, 정지준(丁之雋)[1592~1663]의 「서석(瑞石)」, 이명한(李明漢)[1595~1645]의 「등서석산(登瑞石山)」, 이시성(李時省)[1598~?]의 「원효사(元曉寺)」, 신익전(申翊全)[1605~1660]의 「증심사(證心寺)」,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서석상봉(瑞石上峰)」, 「광석대(廣石臺)」, 이해조(李海朝)[1660~1711]의 「장등서석산모투증심사(將登瑞石山暮投澄心寺)」, 「유숙증심사(留宿澄心寺)」, 「서석산입석대(瑞石山立石臺)」, 신익황(申益愰)[1672~1722]의 「무등산(無等山)」,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마상망서석산(馬上望瑞石山)」, 임상덕(林象德)[1683~1719]의 「서석산지공력(瑞石山指空礫)」, 「관입석(觀立石)」, 「장답서석산숙증심사(將踏瑞石山宿證心寺)」, 김도수(金道洙)[1699~1733]의 「무등산(無等山)」, 위백규(魏伯珪)[1727~1798]의 「유서석산(遊瑞石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등서석산(登瑞石山)」, 조인영(趙寅永)[1782~1850]의 「등광주무등산(登光州無等山)」, 송달수(宋達洙)[1808~1858]의 「갑인초하유서석산(甲寅初夏遊瑞石山)」, 나도규(羅燾圭)[1826~1885]의 「무등산(無等山)」, 김윤식(金允植)[1835~1922]의 「광주무등산천황봉(光州無等山天皇峯)」, 「광석대(廣石臺)」, 「입석(立石)」 등 조선 시대에 꾸준히 무등산을 노래한 시문이 지어졌다.

[무등산 시문의 창작 배경과 시적 대상]

무등산 시문을 남긴 작가 대부분은 무등산을 직접 유람하면서 작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관직이나 유배로 인해 무등산 인근 지역으로 오게 되어 이를 계기로 무등산을 유람한 경우가 있다. 김종직·이해조·조인영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김부륜은 동복현감을, 이안눌은 담양부사를, 신익전은 광주목사를 지냈다. 정약용은 아버지가 화순현감에 부임하여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 머물렀다. 노수신은 진도에서, 김윤식은 신안 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김창흡은 아버지가 영암에 유배되었고, 이하곤은 장인이 강진에 유배되었다. 이렇게 관직이나 유배 등으로 무등산을 지나거나 그 인근 지역에 머무른 것이 무등산 유람의 계기가 되고, 이로 인해 무등산 시문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유배 등과 상관없이 유람 자체를 목적으로 무등산에 오르게 된 경우도 볼 수 있다. 김극기·김시습·송순·기대승·고경명·신익황·임상덕·김도수·송달수·송병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황무등산을 직접 오르지 않고 차운하여 무등산 시문을 남긴 것으로 보이지만, 작가 대부분은 직접 보고 직접 올라 무등산을 시문으로 노래하였다.

이렇듯 무등산을 노래한 시문의 시적 대상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무등산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있다. 김시습의 「등무등산광주」, 김부륜「등서석산」, 신즙「서석산」 등이 그렇다. 둘째, 광석대·규봉·서석대·입석대·지공너덜무등산의 자연경물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있다. 김창흡「광석대」, 임상덕의 「서석산지공력」, 「관입석」, 김윤식의 「광석대」, 「입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규봉사·증심사·원효사무등산에 있는 사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있다. 김극기「규봉사」, 「증심사」, 기대승「원효사」, 이시성의 「원효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등산 시문을 남긴 작가 중 산문인 유람기를 함께 남긴 경우도 있다. 고경명「유서석록(遊瑞石錄)」을, 정약용「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를, 나도규「서석록(瑞石錄)」「서석속록(瑞石續錄)」을, 송병선「서석산기(瑞石山記)」를 남겼다. 무등산을 노래한 시문과 이러한 유람기를 함께 살핀다면 선조들의 무등산 유람을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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