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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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孝曾 |
영어공식명칭 | Ki Hyojeung |
이칭/별칭 | 함재(涵齋),백로(伯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미선 |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이다. 판서(判書) 기건(奇虔)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이다.
[활동 사항]
기효증은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였으며,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1570년(선조 3)에 식년시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부로(父老)들이 장성(長城)에서 모여 기효증을 의곡장(義穀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기효증은 나주(羅州)에 의곡도청(義穀都廳)을 설치하고 격문을 돌려 의곡(義穀) 3,000석을 모았다. 이후 윤승훈(尹承勳)이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지고 오자 기효증이 격문을 내어 의병들을 모으자 사람들이 기효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영광(靈光)과 법성포(法聖浦)에서 모은 의곡 3,200석과 의병 460명을 배에 싣고 의주 용만(龍灣)으로 가 임금을 뵈었다.
기효증이 이끌고 간 의병으로 행조(行朝)를 호위하였고, 싣고 간 의곡은 명나라 군사의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동복현감(同福縣監)이었던 기효증은 천 리[약 393㎞] 길을 근왕(勤王)했다는 공로로 1593년(선조 26)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헌부에서 적을 토벌한 공은 없고 군사와 군량을 수송하면서 각 고을에 횡포만 부린다는 내용으로 탄핵하여 파직당하였고, 1616년(광해 3) 사망하였다.